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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그러게

"...그런데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왜, 니가 재수할 때 재수 성공적으로 마치면 이 번호 쓸거라고 했잖아. 메일 정리하다가 생각나서

  해 봤어. 다행히 받네."

"어, 그러게. 한참 돈 없고 그럴 때 016이나 018로 바꾸려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문득

  전화해 오지 않을까 싶어 안 바꿨거든. 잘 됐네."

"뭐하고 살았어?"

"언제, 재수 끝난 이후로?"

"아니, 그때는 전화했던 것 같은데. 2월 이후로."

"그럼 연대 붙은 건 알겠네."

"너, 연대 갔어?"

"...응. 나도 신기해. 주안에서 용났지? 그 얘긴 그만하자."

"아하하. 그래서? 연대 갔으면 막 응원하고 그랬겠네?"

"어 뭐 그렇지. 들어와서 99랑 연애 하다가..."

"99랑? 너 01 아냐?"

"응. 01."

"패륜 아냐 패륜? 01이 버릇없게 99한테..."

"3월에 어리버리할 때 잘해주는 누나한테 넘어간거지 뭘. 청춘 다 날라갔어."

"아하하. 거짓말."

"그러다가...음...연고전이야 해마다 하는 거니까 뭐 얘기할 거야 없고...난 그냥 놀아. 대학 와서

  지금까지 계속 쭉 놀아. 학점도 별로고, 맨날 술 먹고, 뭐."

"뭐하고 놀아?"

"연극 해. 방학마다 해서 네번 했어."

"정말이야? 조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너 바람둥이나 뺀질이 뭐 이런거 하지?"

"응. 정확하다 야. 이미지 캐스팅이지 뭐."

"한 번 부르지 그랬어."

"얼마 안 있어서 비정기로 하나 할지도 모르거든. 부를게 그때는. 꽃 말고 장난감 사다 줘."

"야, 너 아직도 장난감 갖고 놀아?"

"뭘 아직도야. 그땐 돈 없어서 사지도 못 했구만. 겨우 돈 좀 만지니까 사는 거지 뭘."

"...01답다, 01다워."

"01도 3학년이다 너. 그리고 01로 살면 한살이라도 덜 먹은 것 같아서 좋아."

"그 여자친구랑 계속 만나는 거야?"

"아니, 1학기 끝나고 유학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2학기 시작한지 좀 되고 나서 한 명 사귀었었어."

"..었었어? 또 헤어졌구만? 몇살?"

"동갑. 그러니까 선배. 00. 씨씨였어."

"너 씨씨 두번 한거야?"

"...응. 그래. 죽일 놈이지? 덕분에 03들은 손가락 빼 물고 쳐다만 봤지 뭐."

"왜, 세살 차면 적당하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애들은 그렇게 안 생각하더라고."

"하긴 스물일곱이랑 스물넷이면 몰라도 스물셋이랑 스물은 좀 오바지."

"그래 다들 그 소리 하더라."

"그 여자친구랑은 왜 헤어졌어?"

"별게 다 궁금하네. 사람 헤어지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마음 안 맞으면 헤어지는 거지."

"헤어진지 얼마나 됐어?"

"이제 한 두어달 있으면 1년쯤 되지."

"오-말도 안 돼. 최대호가 1년 참는 거야?"

"나도 사실 잘 안 믿기는데, 참는다기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작년 말정도까지

  만 해도 딴 사람 만나 보려고 하면 생각나는 통에 영 뭐가 안 되더라고."

"순정파네, 순정파. 어쩐 일이래. 서울 양갓집 규수지?"

"응. 강남 아가씨."

"그렇지. 주안 양아치가 규수 봤으니 순정이 났겠지. 옛날 주안 있을 때에는..."

"그게 몇년 전 얘기냐. 나도 이젠 서울 사람이야."

"아하하. 말도 안 돼. 연애랑, 연극이랑, 후배랑, 뭐 더 없어?"

"...그러게. 없네. 술, 이라지만 그건 연극이랑 연애에 포함되는 얘기고..."

"뭐야, 되게 재미없게 살았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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