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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3월 16일

엄마가 입원을 했다. 급환이 아니고 지병이어서 꽤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복학 첫주

에, 컨디션 난조에 이래저래 마음 치이던 차에 겪게 되니 심난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아홉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엄마 옆 자리에서 자지 뭐, 하고 길을 나서는데,

문득, 인도에서 만났던 한 누나 생각이 났다.


갠지스 강이 있는 바라나시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된 누님이었다. 여행 1주차였던 나는, 시간이 지남

에 따라 약간씩 익숙해졌음에도 여전히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만을 궁리하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갠지스강으로 유명한 바라나시였는데, 가이드북에서는 형편없이 소개해 놓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여행객들의 절찬 강추를 받아 택하게 된, 말하자면 반신반의 행 목적지였다. 밤 10시

기차는 역시나 인도답게 연착. 이걸 어쩌나 이걸 어쩌나 발만 동동 구르길 다섯시간이 지나고 새벽

세시에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겨우겨우 칸을 찾아가는데 구석에서 동양 여자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

고 '몇시예요?'라고 한국말로 물어 왔다. 추운데서, 기차가 도대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채 한참이

나 있었던 나는 '세시요. 여기는 사트나예요.'라고 금세 대답했지만 여자는 다시 침낭으로 기어 들어

가 버렸다. 내 쪽도 대화가 이어졌더라면 적잖이 피곤했을 터라 서운함을 느낄 새도 없이 누워

버렸다.


다음 날이 되어도 기차는 아직 도중이었다. 밝아진 햇살에 주섬주섬 일어난 우리는 멀뚱하니 앉아

있기도 머쓱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타지라서 그런지, 애당초 그런 쪽으로 재능

이 없는 것인지 나는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의 나이를 대부분 혹독하게 틀렸는데, 아마도 내 또래일

것이라 생각했던 여자는 사실 여섯살이나 위의 누나였다.


누나는 장애인시설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본디 사진에 마음이 있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 하고 그것이 한이 되어 대학의 교직원으로 일하다가, 끝내 잊지 못 하고 안정적인 수입원

까지 포기해 가며 전문대의 사진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사진학과에 재학하던 중 과제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았던 재활원에서 큰 충격을 받고 졸업 후 사진 쪽이 아니라 재활 쪽으로 진로를 택하

게 된 것이다. 재활원에서의 몇년간에 대한 이야기는,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타지의 기찻간에서 설

렁설렁 듣는 것이 형편없이 무례할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내가 속해 있는 '일반인'의 편견이라는 것

이 얼마나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가를 절감하게 되어, 처음에 누워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종래에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며 짜투리 돈을 모아 마침내 인도여행에 필요한 여

비가 마련되었고,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선물을 자신에게 주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넉넉하지 않은 월급으로, 자리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치료비와 남동생의 학비까지 책임지

고 있었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 겨우 자리가 잡혔을 무렵의 어머니의 급환, 남동생의 대학진

학. 그녀의 인생에는 그녀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요소들이 가득했다. 누나와 나는 갠지스 강 다음의 여행지까지 함께 하게 되었는데, 꽤나 친해진

다음에 나는 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택하고, 인도로 떠나온 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

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나는 한참이나 술잔을 쳐다 보다가 '지금이 아니면 이 인생

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순간들이 있었고, 내 자신에게 그 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쉽게 결정한 것은 없다'라고 답했다.

고식적인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날 밤 해발 이천미터의 날씨 탓이 아니라 그 말을 곱씹느라 몹시 마

음이 추웠다.




엄마의 병원은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 버스도 집 앞에서 바로 탈 수 있는 것이었고. 돌이켜 보면

이런 상황을 낯설어 하며 갑작스레 어떤 사람을 떠올릴 만큼,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입원을 한 일이

적었던 것이다. 취업의 고민은 많다지만 어쨌든 나는 한국에서 손 꼽히는 대학에 재학 중이고, 내 개

인의 이름으로 진 빚도 아직은 없다. 힘들다 힘들다 노래를 부르지만 그 대부분이 나 자신의 의지나

언행과 관련된 것들 뿐이다. 그것으로 감사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다가. 

똑같은 조건에서 엄마가 입원하지 않고 집에 있었을 때에는 생각하지 못 하던 것을 이제야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떠올리는 자신이 간사하게 느껴져 나는 혼자 비굴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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