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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조 사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팔레스타인 땅에 직접 가서 취재하고 체험한 바를 만화로 그려낸 <팔레스타인>으로 1996년 미국도서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저자의 2009년 작. 우리나라에는 작년인 2012년 1월에 출판되었다. 영문 사이트로 좀 더 검색을 해 보니,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이하 <비망록>) 또한 미국 내에서 만화와 관련된 가장 저명한 상하나인 '아이스너 상(Eisner Award)'에서 'The cartoonist creator' 부문을 수상한 바 있었다. 원제는 깔끔하게 <FOOTNOTES IN GAZA>. '가자 비망록'이라고 쓰면 오해를 살까봐 출판부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준 모양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몰타 태생의 미국 언론인 겸 만평가'이다. 직접 취재한 결과물을 만화로 가공해 내는 그의 작업을 우리나라에서는 '언론과 만평'이라고 간단히 소개했지만, 외국의 기사에서는 조금만 살펴 보아도 'cartoon report'나 'short-form comics journalism' 처럼 별도의 장르 명이 붙어있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작 <팔레스타인>은 저자가 1991년 두 달 동안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체험한 그곳의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2002년 9월에 소개되었는데 질좋은 종이가 쓰였고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내내 반값 도서 리스트의 상위에 올라가 있다. 나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10여년 후인 2002년과 2003년, 저자는 다시 팔레스타인을 찾는다. 전작의 취재에서 국제 정치의 한가운데에 놓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고난한 삶에 집중하였다면, 이번에는 1956년에 일어난 '칸 유니스 대학살'과 '라파 대학살'이라는 특정 사건에 주목하였다. 칸 유니스와 라파 주(州)는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우는 중동 지역에서도 특 빈번하게 언급되는 가자(GAZA) 지구 내에 있다.

 

 

 

 

 

 

 

 

위 지도에서 이스라엘 안에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영토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령이다. 이 땅은 본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 위에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이다.

 

20세기까지 나라 없이 유럽과 미국을 떠돌던 유대인들은 19세기의 후반 무렵부터 유대인 국민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시오니즘(Zionism)' 사상을 확립하게 된다. 예루살렘의 고어인 '시온(Zion)'이 곧 운동과 이념의 이름이 되었을만큼 새 국가의 영토는 예루살렘이 서 있는 팔레스타인 땅 외 그 어디도 될 수 없었다.

 

수십 세기 동안 살아온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특정 종교의 경전과 믿음에 의거해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은, 만약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누구도 합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영국의 강력한 후원과 석유의 보고인 중동 지역에 교두보를 설치하고자 했던 미국의 필요가 만나 유대인은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된다.

 

당연히, 이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신생 이스라엘은 아랍권 국가들 맹주를 자처하고 있던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처지였다. '세계의 화약고'의 한 강력한 싹이 여기에 이미 피어고 있었던 것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1918-1970)

 

 

 

 

그 중의 하나가 '수에즈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 1956년의 제 2차 중동 전쟁이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여 세계의 유통에 혁혁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집트 영토 내에 있는 이 운하의 운영권은 그러나 20세기의 중반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었다.

 

1952년에 청년장교들과 함께 일으킨 쿠데타를 통해 부패한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린 바 있는 나세르는 1956년 6월, 이집트의 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같은 해 7월, 국민적 민족주의의 기세를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한다.

 

이 지역에 이권이 달려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통행을 금지당해 큰 불편을 겪게 된 이스라엘에 지원을 약속하며 전쟁을 사주한다. 10월 29일,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기습적으로 이집트를 공격,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 군사행동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 소련 또한 대륙간 탄도탄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자 11월 23일, 정전이 성립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같은 해 12월에, 이스라엘 군은 다음 해인 3월에 이집트 영토에서 철수한다.

 

 

 

 

 

 

 

가자 지구

 

 

 

 

전쟁 중이던 1956년 11월, 가자 지구는 아직 팔레스타인 자치령이 되지 못하고 이집트 영토의 일부였었다.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과 폭력을 자행하였는데 특히 지도에서 아래 쪽에 위치한 라파(Rafah) 주와 그 바로 위의 칸 유니스(Khan Yunes)에서는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UN의 기록에는 칸 유니스에서 275명, 라파에서 111명이 죽었다는 건조한 수치만이 남아있었다. 조 사코는 숫자 너머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알기 위해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가자 지구는 다음 해인 1957년 다시 이집트 령으로 넘어갔다가 67년에 다시 이스라엘 령이 되었고, 94년에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한 잠정적 자가 시작되었다.)

 

 

 

 

 

 

 

 

 

 

 

전작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취재의 결과물이자 과정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캐릭터화하여 작품에 직접 등장한다. 이 캐릭터는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실제 모습보다 좀 더 비열하고 좀스럽게 생겼는데,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물론 역사적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지만, 좀처럼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노인들에게는 짜증을 내기도 하고, '한 탕'의 기사를 건져내겠다는 속물적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 묘사의 과정이 무척 인간적이고 사실적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진지한 내용을 읽다가 한 차례 웃음을 지으며 긴장이 풀리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의도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참혹한 기억들에 공감이나 연민과 같은 '주관적' 시선을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한다. 착하고 정의롭게 생긴 주인공이 팔레스타인 할머니들의 옛 기억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든지 하는 식의 신파조로 전달하지 않아도,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이가 건조하게 들은 바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건과 그에 얽힌 기억은 이미 끔찍한 비극이다.

 

 

 

 

 

 

 

 

 

어쨌든 '그래픽 노블'이라 일본식 '망가'에 익숙해진 눈에는 여전히 꺼끌꺼끌하지만, 한 장에 그림 하나만 그려져 있고 엄청나게 많은 글이 실려 있는 컷도 많았던 전작 <팔레스타인>에 비하면 이 <비망록>은 대체로 한 장에 여러 칸이 구획되어 있고 한 칸에 전달되는 정보량도 그리 많지 않다. 십 년 터울을 두고 그려진 것인만큼 독특한 그림체의 발전도 수월한 독서를 돕는다.

 

본문은 크게 '칸 유니스', '축제', '라파'의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20여 쪽의 '칸 유니스' 편은 칸 유니스 사건 관해, 140여 쪽의 '라파' 편은 라파 사건에 관해 다룬 것이고, 30페이지 가량의 '축제'편은 저자가 칸 유니스에서 라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일종의 인터미션이다.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칸 유니스'와 '라파' 편은 저자가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지역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기본 뼈대로 삼는다.

 

하지만 취재의 발걸음은 녹록치 않다. 시간이 너무 지나 생존자도 많이 남지 않았을 뿐더러 그 이후로 계속 이스엘의 공습에 시달려온 노인들의 기억은 아귀가 딱 들어맞질 않는다. 그리고 취재를 하는 중에도 날아오는 이스라엘의 포탄과 미사일은 팔레스타인인과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취재를 힘들게 했던 여러 요소들 중, 작가 스스로도 몇 차례 강조를 했고 독자인 나도 큰 인상을 받았던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왜 1956년인가?'라는 질문이었다. 1956년의 일을 묻는 그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질문을 수 차례나 했다. 서양인인 당신이 1956년의 우리 역사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우호적 발화가 아니다.

 

이 책에 그 실체적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진 1956년 11월은, 분명 끔찍한 참사였다. 하지만 비극적 일상은 60년대, 70년대에도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있다. 조 사코가 취재를 마치고 이 책의 영어판을 출간하려 준비하고 있던 2007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전체를 '적지'로 선포했으며 미국과 유럽 연합은 가자 지구 봉쇄에 참여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준비되고 있던 2009년에는 22일동안 1,400명의 가자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독자 중의 한 명인 내가 독후감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13년 4월 3일인데, 바로 어제인 4월 2일, 이스라엘 군은 4개월 간의 휴전깨고 전투기로 가자 지구 공습을 강행했다. 이런 그들에게, '왜 1956년만을 묻는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문은, 그러나 전혀 엉뚱하지 않다.

 

장르가 만화이고 저자는 이미 만화를 통해 저널리즘을 전달하는 데 정평이 난 사람이니, 편하게 누워 읽자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과 슬픔의 깊이를 알기에는 이 책만으로는 모자랄 듯 하다. 팔레스타인에 관해 레포트를 준비 중이거나 체계적인 공부를 원하는 분이라면 비추. 나와 같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지치지게,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공부를 시작해 보고자 하는 분에게라면 강추다. 정가는 25,000원. 나는 전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