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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4

얼티밋 워리어 (1959-2014)

 

 

 

 

 

전세계의 프로레슬링 협회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단체인 미국의 WWE에는 상근하는 시나리오 작가만 수십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당대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적 코드를 감안하여 선수들을 선역악역으로 나누고 갖자에 맞는 캐릭터와 필살기를 부여한다고 한다. 적어도 WWE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우리보고 있는 경기는 '가장 진짜 같은 가짜'이다.

 

 

따라서, 경기 내에서의 '경기력'은 우리가 경기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자연스레 연상하는 근력, 순발력 등의신체 능력과는 조금 다르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후 프로레슬링 선수로 전업한 커트 앵글은 그 이력이 증명해 주듯 신체 능력에 있어서는 여타 선수를 월등히 압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런 그 또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형편없이 당하는 약자 캐릭터를 맡거나 관객과 철저히 대립하는 악역 캐릭터를 맡기도 했다.

  

 

좋은 '경기력'이란 기본적인 신체 능력 외에도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는 언어감각, 한 편의 '쇼'로서의 경기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방송 감각, 동료 선수와 경기를 할 때 보이는 것보다 덜 

세게 때리고 보이는 것보다 아프게 맞아주는 연기력, 그리고 같은 협회 내 선수들과의 친목과 같은 다종한 항목을 갖는 능력이다. 소수의 '수퍼 스타'들은 대개 이러한 세부 항목을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워리어'로 통칭되는 '얼티밋 워리어'는 그런 면에서 볼 때 무척 특이한 선수였다. 특유의 웅얼거리는 발음과 동문서답하는 발언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다. 쇼의 흐름과 상관 없이 강력한 필살기로 경기를 서둘러 마치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강약을 조절하지 않는 기술 사용으로 숱한 동료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시나리오 상에서 대립할 뿐인 인물과 실제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으며 그 외의 선수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는것은 레슬링 팬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여타 선수와 비할 수 없는 압도적 야성미와 원초적 폭발력이 강한 호소력을 가졌고, '워리어'라는 캐릭터가 WWE 역사상 가장 강력한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음에도, 프로레슬링 선수 제임스 브라이언 헬위그가 오랫동안 무대를 떠나있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인 2014년, 그 워리어가 18년 간의 침묵을 깨고 WWE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이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WWE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부상으로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게 된 선수나 이미 전성기가 지난 연로한 선수라도 대중이 선호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생존해 나갈 수 있다. 과거의 영광을 다시 음미할 수 있게 된 왕년의 스타와 강력한 아이콘을 재발굴해 써먹을 수 있게 된 WWE 협회, 양

쪽에게 모두 득이 되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복귀하여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지 3일이 지난 4월 8일, 워리어는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온라인 상의 프로레슬링 팬카페 등에서는 심장마비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80년대의 토요일 오후를 AFKN 앞에 앉아 보냈던 소년이라면 근무 중 잠깐의 휴식시간에라도 어딘가 아련한 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의 세계는 지금의 현실보다 단순하고 재미있었다. PC방도 카톡 게임도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늘 신이 나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안 난다. 그 환타스틱한 세계의 한 가운데에 워리어가 포효하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 편'으로. 그 우리 편이, 죽었다.

  

검색 포털에 '얼티밋 워리어'를 검색해 보자, 인물 소개 란에 기억 속의 워리어 캐릭터가 아니라 처음 보는 50대 미국 아저씨의 사진이 떴다. 그 사진을 쳐다보다 나는 몇 달 전 다시 보았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더레슬러>를 떠올렸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와 가족,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었던 자신의 몸으로부터까지 버림 받은 왕년의 레슬링 스타가 단 한 번 번쩍하고 빛난 것은 동네 체육관의 3단 로프 위에서 날아오르듯 점프하는 엔딩 신이었다. 마치 영화처럼, 제임스 브라이언 헬위그에게도 마지막으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허락되었던 셈이다. 마음 속 WWF 키드가 눈물을 닦고 당신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좋은,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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