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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激動週末

이재용이 후계자로서 살아남은 것, 양정례가 국회의원 오찬에 참가한 것, 이 정도쯤 되어도, 개탄할

수는 있지만 20대 초반에 정몽준의 뒷통수 때리기와 탄핵을 겪었던 나로서는 대경실색할 일은 아니

다. 있을 법한 일이, 있을 법한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니까. 사실 이 문단에 이렇게 조용히 마침표를

찍고 넘어가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대운하 정책이 이름만 바꾸고 물밑에서 계속 추진 중이었다는 뉴스만 해도, 큰 일기거리이다. 하지만

서울시장부터의 현 대통령의 노정을 봐 온 사람이라면, 강세를 주기 위해 '놀라운 일이다'라는 표현을

썼을지언정 실제로는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 법한 놈이, 할 법한 짓 했으니까. (이 '놈'이라

는 표현이, 논거도 없는 반 이명박 정서의 무식한 표현으로 보일까 두려워 나는 꽤 오래 고민하다가

여러가지의 논리들보다 감정이 훨씬 더 큰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었다.)


대학원 첫 학기의 숙제와 발표준비가 산더미란 말이다. 집안이 편안한 것도 아니고. 덕분에 이 석 달

동안 참석하지 못 한 모임이 몇 개이며 챙기지 못 한 사람이 몇 명인지! (천 개가 넘는 일기에 있는

느낌표를 모두 모아 봐도 백 개가 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느낌표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정치권의 모든 동향에 촉각을 세울 만한 시간과 열정이 넘쳐 나던 이십대 초반이

아니다. 일기에 정치적 소신을 밝힌 다음 날이면 백양로와 동방서 만나는 주위의 선후배들과 맹렬

한 토론을 벌이던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지금 대다

수 후배들의 대학 생활 중 가장 큰 이벤트는 단 두 개다. 저학년 때의 아카라카에서 아이돌에게 열광

하기와 고학년 때의 취업박람회 발품팔기. 예외랍시고 따져 보자면 고시나 CPA 준비하는 애들 정도

일까. 새벽 세 시쯤에도 여전히 신촌의 어딘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학생회 동생들이 아니라면,

여타의 후배들에게 정치와 사회 이야기를 할 때 -좀처럼 꺼내지도 않지만- 내가 느끼는 시선은 군

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동생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한가하게 일기나 쓰고 있을 판이 아

닌, 그런 이십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말을 전후해 전해진 다음의 두 뉴스에 대단히 놀랐고,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첫째로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의 연대. -합당이 아니라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연대일 뿐이라

고 본인들은 표현했지만, 아무튼-

문국현이 애초 완벽한 대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

이다. 현재의 정치판에서 이 이상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뉴스는 진보신당과 친박연대의 합당 정도 뿐

일 것이다. 말하자면, 일어나리라 생각할 수 없었던 일 리스트의 맨 끝줄에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

랄까. 문빠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오마이뉴스의 필진들은 일제히 반성과 규탄에 나섰고 -신기하게도,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하게도- 조중동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문국현의 복안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여의도의 일은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인

으로서의 문국현은 여기에서 죽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이미지를 훼손시킨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 문국현은 진보 진영과 동일한 노선을 견지

했던 후보가 아니었다. 딱 잘라 말해, 이 번에 진보가 뽑히긴 틀렸고 국민들이 원하는대로 돈을 물어

다 줄 '실용' 대통령이 뽑혀야 한다면 이명박보다는 문국현이 백배 낫다, 였잖은가. 생각(이념)없는

실용이되, 최소한 원칙은 지키는 실용. 진보 진영에서도 대충 이런 생각으로 지지를 했던 것이니 사

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 '이미지의 훼손'만으로 문국현의 죽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심각한 사인死因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 문제이다. 애당초 보수 정치인이었는데, 이미지를 앞

세워 일단 당선된 뒤 마침내 구태를 드러내고 세를 불리기 위한 첫 걸음을 뗀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파트너쉽을 구축할 세력으로서 이회창의 사당私黨인 자유선진당을 택한 것은 정치적 판단력의 심각

한 결여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되면 2007 대선에서의 민주당 경선 불참은 단호한 정치적 소신의 결과

가 아니라 단순히 감각이 모자란 소산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악당인 것과 능력이 있는

것은 무관하므로 악당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지만, 무식한

악당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이한정 비례대표 사건에 서툴게 대응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문국현의

변사는 더욱 확실해 보인다. 박근혜 여사를 좀 배우시게. 훨씬 괴기한 양정례를 들이고도 청와대에

가서 목에 힘주는가 하면 외국에 놀러가 대통령 놀이까지 하는 박근혜 여사를 좀. 첫 발을 내디딘 정

치인에게는 잔혹한 진단이겠지만, 소중한 휴일을 투자해 대선과 총선에서 지지를 보내 줬던 유권자

로서 이 정도의 말은 차라리 온건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청계천의 오만 명 청와대로 돌진. 정말로 놀랍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다들

이명박 정부에게 바랬던 것은 오직 한 가지 show me the money뿐이었는데. 통일을 하라고 하길 했

나, 국가정의를 실현하라고 하길 했나, 동서화합을 시키라고 했나, 아니면 과거사를 청산하라고 했나.

누가 이명박한테 그런 걸 기대했을까. 그저 돈 벌 거리나 만들어다 줬으면 조용히 5년 채우고 나갔을

텐데. 한나라당이 여당 됐으니 탄핵안이 가결될 리도 없고 헌재의 꼰대들이 승인해 줄리도 없으니 아

무튼 5년은 채우겠지만, 조용히 보내긴 틀렸지 뭘.

이외로 경찰의 과잉진압 이야기가 새벽 세 시를 넘긴 현재 인터넷에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임산부

를 폭행했다는 이야기나 살수차를 가동시켰다, 시민들이 있는 도로에 차량통행을 재개시켰다,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정부가 집회와 관련하여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는 일련의 인터넷 뉴스들을 차단시

키고 있다는 소식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집회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에 관해서만이라도 다시 한 번 집회가 열려야 할 것이다. 그 집회에는,

유월의 넷째 주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점점 바빠지는 대학원 생활이지만, 반드시 참가할 것이다.


사족이지만, 경찰의 과잉진압 뉴스를 보면서 나는 문득 토요일이었던 어제(2008.05.25)자 조선일보

를 떠올렸다. 조선일보는 1면과 2면을 할애해, 뜬금없이 '매맞는 공권력'이라는 제목으로 경찰들이

근무 중 구타나 봉변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기사를 실었다. 경찰조직에

몸담았던 이로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주취자가 경찰서 구석에 소변을 봤다든가, 검

사나 판사를 데려오라며 경찰을 무시했다든가 하는 개개의 내용들도 기왕에 알려져 있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례들이 아니었고, 조선일보에서는 며칠째 방만한 공조직 운영에 대한 비판 논조의

기사를 실어온데다, 내 일기에도 앞서 길게 적었듯이 1면에 실려야 할 정치사회 현안들이 산적해 있

는 판이었다. 나는 얘들이 왜 갑자기 이런 기사를 쓰는 것일까, 라고 의아해 했었는데, 오늘 인터넷에

올라온 경찰의 과잉진압 관련 뉴스들을 보며 조선일보의 혜안慧眼에 무릎을 쳤다. 내일이나 모레 자

조선일보에는, 이번 집회에서 일어난 '불순분자들의 폭력적 난동'과 '그에 의해 상처 받는 공권력'이

주제로 다루어지겠지. 마무리는 올 5월 조선일보의 최대 프로젝트인 '주동세력을 잡아라'일테고.

과연, 나라를 수십 년간 주무르는 경륜이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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