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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조선 형사 홍윤식






기웅이형이 쓰고 재엽이형이 연출한 <조선형사 홍윤식>을 보고 왔다. 한다는 소식은 듣지도 못 하고

있다가 조선일보에 난 호평을 보고야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후배인 K군이 어디서 표가 났다

고 하길래 가 본 것이다. 공연은 대학로 이다 홀. 정보 소극장 옆에 있다는데 대학로에서 공연장을

찾는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라 혼자서 한참을 헤맸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데도 공연 시작 한시간

반 전에 도착한 탓에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소영이 누나가 시간이 좀 있는지

삼십여 분 정도 놀아줬다. 기말고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 결혼식에 못 갔던 것을 두 사람 모두에게

사과하고 싶었는데 재엽이 형은 몸이 안 좋아서 공연장에 못 왔다고 한다.


기대가 컸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기도 했지만 기웅이형이 쓴 작품들은 항상 재미있게 봐 왔기도 했

고, 이번 학기에 제법 흥미가 동해 공부를 했던 부분들이 겹쳐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막이 오르기 전

나오는 음악은 <고전시가연습>이라는 수업에서 배우고 들었던 신민요와 창가를 떠올리게 하였고,

1940년대의 영아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해 짜여진 플롯은 이광수부터 조세희까지를 훑었던 <우리소

설읽기>의 식민지 시절 부분을 연상시켰다.


한시간 사십여분의 공연을 관람하며 첫번째로 든 생각은 배우들의 말이 예외없이 지나치게 빠르다

는 것이었다. 소영이 누나의 경우에야 학부 때부터 워낙 발음에는 정평이 나 있었으니 그렇다 치지

만, 몇몇 배우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내용에서 발음상의 문제나 지나친 발성으로 인

해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당시 경성에서 쓰였다는 생경한 말투와 무척이

나 빠른 대사속도에 적응해 가며 극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전자는 이 극의 미덕일 수도 있

었을텐데 무척 안타까웠다.)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쉴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내용을 반추해 본 바로는 애당초의

내용상에서, 백분여의 러닝타임을 갖는 극 치고는 완급에 대한 배려가 적지 않았나 생각하게 됐다.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할 정보와 감정의 양과 질이 다른 극에 비해 얕거나 적은 편도 아니고 게다가

배우의 수까지 많은 상황이니, 어느 장면 하나 놓칠 수 없는 배우들로서는 당연히 계속해서 텐션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시간 반이 넘게 텐션을 강요받는 관객으로서는 다소간 지

치게 되어, 공연 시작 후 한시간 이십분 정도가 지나 이제 '그로테스쿠한' 사건이 절정을 맞이하고

지척의 거리에서 배우가 쇳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관객들이 의자에 등을 대고 늘어져 있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작품이 영화였다면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들을 통해 좀 더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고 K군은 말했다.

열명이 넘는 배역들의 포지셔닝이 불확실한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그 본래적 속성이나 역할을 생각

해 볼 때, 목적이 불투명하거나 권력관계가 비효율적인 듯한 캐릭터들이 있었다. 혹은 분량상으로 분

명히 주연급임에도 처음부터 지나치게 확연히 드러나는 목적으로 끝까지 단조롭게 일관하는 캐릭

터도 있었다. 결국, 빠른 속도에 멍해지고 쉴 틈이 없었던 관객들로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극본상에서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과는 별도로 취급되어야

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부터는 다소간 개인적인 불평이지만, 내게는 재미있는 개인기나 특이한 외모를 가진 배우가 때

때로 극의 내용 밖으로 나와 일시적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사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꼰대 기질이 있다.

<조선 형사 홍윤식>에서도 소수의 배우들이 이따금 그러한 장면들을 보여 줬는데, 같이 관람을 했

던 K군의 증언에 의하면 극단 드림플레이의 다른 연극들에서도 대개 관객들로부터 그러한 호응을

이끌어 내는 연기를 이따금 보여 주던 배우들이라고 했다. 혹 웃음이 갖는 이완의 속성을 감안하여

배치한 연출적 장치인가, 하고 생각하며 극을 다시 떠올려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용상 쉬어갈 곳이 아닌 것 같은 부분도 떠오르거니와, 혹여 그러한 의도였다 할지라도

해당 배우의 에너지가 관객에게 쉬게 하는 웃음을 짓게 할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음악은 무척 좋았다. 하긴 마음에 안 들었다 하더라도 한재권 감독님의 음악에 딴지를 걸었다가는

아무리 아는 사람 없는 이곳이라지만 온라인 테러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니. (내 주위에도 한 감독님

의 광신도들이 몇 있다.)


무대는 재엽이형이 즐겨 사용하는 예의 '박스형' 무대였는데, 경제적인 설치와 연극적 상상력이 흥

미로웠다. 다만 창의 사용은 조금 과다하지 않았나 싶다. 무대와 조명은 동행한 K군의 전공이니

이후 그의 관람기를 따로이 요청하기로 하고 이만 줄여 보자.



공연이 끝나고 기웅이형을 만날 수 있었다. 10월에 올라갈 연극의 극본을 쓰느라 시간이 부족하다

는 형의 얼굴은 좀 피곤해 보였다. 형은 내가 제대한 직후 당시 형이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삼

등병>의 오퍼레이터를 부탁해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생애 언제 또 가게 될 수 있을지 모를 인도여

행을 앞두고 있던 나는 극본을 받고서도 거절을 했던 터였다. 이후 죄송스런 마음이 있었는데, 공연을

보고 나서 어떻게든 보고 난 감상을 말하고 그 감상이 올바른 것인지를 듣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종알종알 잘도 떠들었다. 형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버릇없이 생각하는

대로 말한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형의 다음 연극은 구보씨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구보씨라니. 이번 1학기를 거치며 이광수를 더욱

폄하하고 박태원을 추종하게 된 나로서는 가슴 쿵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천변

풍경의 박태원에 국한한 것이었지만, 아무튼간에.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한다는데, 이번엔 꼭 날

짜 맞춰 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형하고 헤어지고, 무언가 말은 더 하고 싶은데 붙잡고 말할 사람이 없는 K군과 나는 마로니에 공원

을 찾아 아베크족들의 사이를 배회하며 서로의 감상평을 마음껏 떠들다가, '에이, 라디오의 시간 올

려 놓고 누가 누굴 평가해'라고 결론을 내린 뒤 쓸쓸하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