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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And I'm back.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물의 숫컷은 자신의 대변과 정액을 남긴 곳은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

고 그 안에서는 자신감 있게 행동한다고.


딱히 그런 이론때문이 아니라도, 새 장소에 가서 큰 일을 보는 것은 그 장소에 적응하기 시작할 때

에 중요한 일 같다.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생활이 시작되니까.


딱히 서울에서 하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1학년 1학기때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역인 인천터미널부터 학교가 있는 신촌역까지,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역의

화장실에 가 보리라. 그 전부를 내 영역으로 삼으리라.


결국 1학기에는 아침수업이 많아서 성공하지 못 했고, 야심차게 오후수업들로 채워본 2학기째부터는

신촌에서 하숙을 하게 되어 그 계획을 잊고 살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참동안이나 잊고 있었던 그 생각을 오늘에서야 떠올린 것은 또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어제는 술을 과하게 마신 날이었다. 방명록의 한 답글에도 적었듯이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 한잔 두잔 기울인 것이 그만 도를 넘어 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그 상태 그대로는 도

저히 과외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어 인천으로 내려오는 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십여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인천행 직통열차, 마침 나온 방송에서는 사고로 인해 한동안 운행하지 않는단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돌아서는데 건너편에서 인천행 국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씨익 웃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피해 버렸다. '나도 당했다' 뭐 이런거겠지.


다행히 사람들은 많지 않아 앉을 수가 있었는데, 흘낏 본 옆자리의 아가씨가, 아, 첫사랑의 그녀인

것 같았다. 처음에 옆자리에 앉았을 때 그 향수를 맡아 내고 옛 생각에 씨익 웃었던 것인데, 설마

그녀라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더욱 당황스러워 쳐다보지도 못 하고, 책을 읽는 척하며

어떻게든 옆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린 곳이 국철의 한 역인 온수.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그 곳에서 나는 그녀를 따라

무작정 내렸다.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몽유병 환자처럼 붕붕 따라가는데 한 할아버지가 등짝을 후려

갈기고는 정신 차리라며 건네 주었다. 평소같으면 화를 낼 법하게 아픈 한 대였지만 예예하고는 다시

따라가려는데, 아차, 사라진 것이 아닌가. 결국 그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서운함이 들고, 한 편으로는 지금 다시 만나 무엇을 어

찌 하랴라는 체념이 들어 복잡한 기분을 참지 못 해 에이 이놈의 동네 이거나 먹어라 하고 화장실

을 찾다가, 아, 그 생각이 난 것이다. 먼 옛날의 그 생각. 덕분에 볼 일을 보면서 혼자 키득키득 웃었

다. 이렇게 온수도 내 발 밑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선한 방학 중일텐데 지저분한 얘기해서 미안. 이렇게 지저분하게, 최대호 여행에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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