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타 없어졌다. 나는 못 봤지만, 불타는 장면이 다섯 시간동안 생방송되었다고도 한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아, 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신문과 포털을 온통 뒤덮고 있
는 관련기사들을 찾아 읽었다. 가슴은 한층 더 먹먹해졌다. 상황 자체가 애당초 어처구니없는 데가
있어 내 생각의 자리를 잡고 앉기가 어려운 판에 이상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말들이 오고가는
데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숭례문이 불탄 자리에서 나라가 망했다며 울고 있는 할머니를 이
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국보 2호도 모르면서 국보 1호 하나 불탔다고 뭘 그리 난리들이냐는 지
나친 냉소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왜 이 기사가 말이 안 되는지, 이 주장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려면
어떤 면을 지적해야 좋을지 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판이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 자체를 슬퍼하는 기사들에는 '병란과 호란 때에도 불타지 않은'이라는 표현
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건축물이 신령스러운 힘이
있어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침략군이 내버려 두었던 것 뿐이다. 결국 이런 말을 하는 의
도는 심각한 위기에서도 숭례문은 용케 살아남아 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일텐데, 이번 화재는 국
가적인 위기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를 가진 한 개인에 의해 벌어진 것이니 애당초 전제가 틀린 이야기
이다. 모르고 썼다면 '기사'라는 글이 가져야 할 무게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거나 전제의 차이를 인
식할만한 최소한의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고, 알고도 썼다면 흔히 있는 선정성의 획득을 위
한 천박한 시도이거나 혹은 위험한 생각을 퍼뜨리려는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목조건물을 다루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어설픈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도 수차례
방송되었다. 초기의 한두 차례라면야 이러한 지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러한 훈련
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어떤 부서인지,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했을지, 앞으로 실제 시행이 되
려면 얼만큼의 예산과 인원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기사가 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목숨 걸고 그 높이
에 불끄러 간 말단 소방공무원들의 어설픈 언행들만을 계속해서 방영하는 태도는 책임있는 것이라
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흔히 나오는 '평소의 관심' 운운도 보기 껄끄러웠다. 이번 일을 처리하여 목조
건물인 국보의 화재발생시에 대한 매뉴얼이 생겼다 치자. 다음엔 어떤 종류의 사건이 어디에서 일
어날지, 국민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삼풍과 성수대교 전에는 국내 건축계의 허술한 뒷사정에 대
해, 씨랜드 전에는 유아보호시설의 취약함에 대해, 숭례문 전에는 목조건물의 구조에 대해 꿰고
있었어야만 부끄럽지 않은 국민일 수 있는 것일까? 책임자 이외에 반드시 누군가가 하나 더 반성을
해야만 한다면, 그러한 일들을 미리 알아내어 알려야 할 언론이 마땅히 그 역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
닐까. 그런데도 선정적인 기사들만을 일삼으며 마지막에 헛기침을 섞어 우리 국민 모두의 탓이다,
라고 괜한 말을 덧붙이는 데에는 기가 차다고밖에 할 수 없다.
입 있는 사람은 다 한 마디씩 하는 통에 애당초 상대할 가치가 없는 -'다 노무현 새끼 때문이다'등의,
심지어 믿기 어렵지만 '박통이라면 이런 일 없었다'는 글도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의 망령
은 도대체 언제쯤이나 사라질 것인가 - 사견류의 글을 제하고라도 엄청나게 많은 주장들이 있어 그
때그때 드는 생각들을 모두 적기란 어려웠다. 수백개의 글들을 읽다 보니 나중에는 다소간 둔감해져
있었는데, 재임하기 전부터 큰 말실수 여러번 하시는, 그러나 대부분 언론에 의해 곱게도 포장되는
대통령 당선자가 또 이상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다. 물론 국민의 힘으로 다시 숭례문을 세워 보자
는 순수한 의도의 발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명박식 정치의 한 일면을 엿보게 하는 단초
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관해 더 쓰고도 싶고, 훗날에는 이명박의 당선이 역
사의 후퇴였다고 누구나 납득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만 단초는 단초일 뿐이다. 올바른 과정과 좋은
결과를 갖는 일이라면 찬성하고 협력하는 것이 양식있는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 여기서
는 넘어간다. 면상이 보기 싫다고 무작정 욕부터 하고 시작한다면 2002년의 패기만만했던 노무현
을 2008년의 노무현으로 만들어 버린 세력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전제도 질량도 각각 다른 생각들을 하다 지쳐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엉망진창이든 어쨌든 일단
일기에 올려나 두자, 생각하며 잠시 쉬다가 엉뚱하게 레고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올린 사진을 보았다.
관광을 온 일본인들이 불탄 숭례문 앞에서 웃으며 V자를 그린 채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민족주의에
대해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로서도 울컥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러
다 문득, 만약 이번의 방화범이 조선족이었다면, 혹 중국인이었다면, 혹 일본인이었다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11 이후 아랍인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졌던 미국에 대해 우
리는 오만했던 날들의 자업자득이라느니, 겁쟁이 백인의 속성이 또 나왔느니 하며 비웃었었는데,
만약 일본인이나 중국인, 혹 미군이 불을 질렀더라면 우리 국민은, 최소한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섬뜩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아, 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신문과 포털을 온통 뒤덮고 있
는 관련기사들을 찾아 읽었다. 가슴은 한층 더 먹먹해졌다. 상황 자체가 애당초 어처구니없는 데가
있어 내 생각의 자리를 잡고 앉기가 어려운 판에 이상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말들이 오고가는
데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숭례문이 불탄 자리에서 나라가 망했다며 울고 있는 할머니를 이
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국보 2호도 모르면서 국보 1호 하나 불탔다고 뭘 그리 난리들이냐는 지
나친 냉소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왜 이 기사가 말이 안 되는지, 이 주장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려면
어떤 면을 지적해야 좋을지 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판이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 자체를 슬퍼하는 기사들에는 '병란과 호란 때에도 불타지 않은'이라는 표현
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건축물이 신령스러운 힘이
있어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침략군이 내버려 두었던 것 뿐이다. 결국 이런 말을 하는 의
도는 심각한 위기에서도 숭례문은 용케 살아남아 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일텐데, 이번 화재는 국
가적인 위기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를 가진 한 개인에 의해 벌어진 것이니 애당초 전제가 틀린 이야기
이다. 모르고 썼다면 '기사'라는 글이 가져야 할 무게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거나 전제의 차이를 인
식할만한 최소한의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고, 알고도 썼다면 흔히 있는 선정성의 획득을 위
한 천박한 시도이거나 혹은 위험한 생각을 퍼뜨리려는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목조건물을 다루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어설픈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도 수차례
방송되었다. 초기의 한두 차례라면야 이러한 지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러한 훈련
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어떤 부서인지,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했을지, 앞으로 실제 시행이 되
려면 얼만큼의 예산과 인원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기사가 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목숨 걸고 그 높이
에 불끄러 간 말단 소방공무원들의 어설픈 언행들만을 계속해서 방영하는 태도는 책임있는 것이라
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흔히 나오는 '평소의 관심' 운운도 보기 껄끄러웠다. 이번 일을 처리하여 목조
건물인 국보의 화재발생시에 대한 매뉴얼이 생겼다 치자. 다음엔 어떤 종류의 사건이 어디에서 일
어날지, 국민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삼풍과 성수대교 전에는 국내 건축계의 허술한 뒷사정에 대
해, 씨랜드 전에는 유아보호시설의 취약함에 대해, 숭례문 전에는 목조건물의 구조에 대해 꿰고
있었어야만 부끄럽지 않은 국민일 수 있는 것일까? 책임자 이외에 반드시 누군가가 하나 더 반성을
해야만 한다면, 그러한 일들을 미리 알아내어 알려야 할 언론이 마땅히 그 역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
닐까. 그런데도 선정적인 기사들만을 일삼으며 마지막에 헛기침을 섞어 우리 국민 모두의 탓이다,
라고 괜한 말을 덧붙이는 데에는 기가 차다고밖에 할 수 없다.
입 있는 사람은 다 한 마디씩 하는 통에 애당초 상대할 가치가 없는 -'다 노무현 새끼 때문이다'등의,
심지어 믿기 어렵지만 '박통이라면 이런 일 없었다'는 글도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의 망령
은 도대체 언제쯤이나 사라질 것인가 - 사견류의 글을 제하고라도 엄청나게 많은 주장들이 있어 그
때그때 드는 생각들을 모두 적기란 어려웠다. 수백개의 글들을 읽다 보니 나중에는 다소간 둔감해져
있었는데, 재임하기 전부터 큰 말실수 여러번 하시는, 그러나 대부분 언론에 의해 곱게도 포장되는
대통령 당선자가 또 이상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다. 물론 국민의 힘으로 다시 숭례문을 세워 보자
는 순수한 의도의 발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명박식 정치의 한 일면을 엿보게 하는 단초
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관해 더 쓰고도 싶고, 훗날에는 이명박의 당선이 역
사의 후퇴였다고 누구나 납득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만 단초는 단초일 뿐이다. 올바른 과정과 좋은
결과를 갖는 일이라면 찬성하고 협력하는 것이 양식있는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 여기서
는 넘어간다. 면상이 보기 싫다고 무작정 욕부터 하고 시작한다면 2002년의 패기만만했던 노무현
을 2008년의 노무현으로 만들어 버린 세력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전제도 질량도 각각 다른 생각들을 하다 지쳐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엉망진창이든 어쨌든 일단
일기에 올려나 두자, 생각하며 잠시 쉬다가 엉뚱하게 레고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올린 사진을 보았다.
관광을 온 일본인들이 불탄 숭례문 앞에서 웃으며 V자를 그린 채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민족주의에
대해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로서도 울컥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러
다 문득, 만약 이번의 방화범이 조선족이었다면, 혹 중국인이었다면, 혹 일본인이었다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11 이후 아랍인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졌던 미국에 대해 우
리는 오만했던 날들의 자업자득이라느니, 겁쟁이 백인의 속성이 또 나왔느니 하며 비웃었었는데,
만약 일본인이나 중국인, 혹 미군이 불을 질렀더라면 우리 국민은, 최소한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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