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가 미키 사토시의 영화감독 데뷔작. 사실 영화 정보를 찾아보기 이전엔 감독이 각본가 출신이
라는 사실은 알지도 못 했고, 그저 <스윙걸즈>의 빛나는 주연 우에노 쥬리의 차기작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택했던 것 뿐이었다. 당시 연애하던 사람과 일본문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 <스윙 걸즈>
를 함께 즐겁게 보았다는 것 등의 공통사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선지식 없이 택했던 것인데, 의
외의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가 무척이나 신선하고 즐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혹여 그 맘때쯤 행복
하게 연애를 하던 기억이 날까 싶어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오래 묵혀 두었던 영화였다. 노래
든 책이든 영화든, 다들 그런 추억들은 하나쯤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봐도, 재미있는 영화였다.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지는 직선투구의 개똥철학, <스윙 걸즈>에
서는 호평받았지만 그 뒤로 썩 나아지지 않은 우에노 쥬리의 연기 (일본 드라마에 정통한 한 지인의
언급에 의하면 최근의 화제작이었던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그녀의 연기는 그다지 달라지
지 않았다고 한다.) 등이, 개성 없는 기성복보다는 어설픈 수제품의 매력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는 내게
유효했다고 할까.
그러나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데에는 그 것 외에도 중요한 점이 있다고 여긴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문단, 예술계에서 집요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일상성의 탐구'의 조류는,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단선화된 서사나 투철한 정치적 이념 등의 거대 주제의식, 전형화된 캐릭터성과
같은 '권위'를 탈피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낳기도 하였다. 마치 자폐와 같은, 애당초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한 것처럼 보이는 극단적
주관의식의 세계, 소재와 제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제까지 그저 '일상'일 뿐인, 문제의식의 제기
를 통한 해체 뒤의 재조립에 대해서는 대안을 갖지 못 하는 저차원적 작가의식, 오로지 본질에서
멀어진 문체의 향연에 모든 것을 헌납하는 문학관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문학과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환상성이나 일상성에 대해 그 정신적 토양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는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빈번한 자연재해에 시달
려야 하는 환태평양 조산대 위에 있다는 지리적 인식, 섬나라라는 정치지리학적 사실, 오랜 기간 무
사의 통치를 받아 온 사회구조학적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20세기 초반 제국으로서의 역사와 1945
년 '핵', 이후 이어진 미국의 전후통치에 대한 역사적 기억 등이 그 주요한 구성인자라고 본다.)
특히 일상성의 경우 모든 예술작품들이 긍정적인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가 그렇다. 나는 유종호 선생님의 문학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변태성욕자와 사회부적응자가 판치는 허접쓰레기이자 죽음의 문학'
이라는 평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적어도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사실 일상적이지
않거나, 일상적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성찰은 일본예술이 일구어낸 빛나는
가치라 할 수 있겠다. 후자의 맥락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4월이야기>나 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와 같은 작품들인데, 일상 속에서 찾아지는 여러 가지 가치 중에서도 서정성에 주목
했다는 점, 그리고 그 서정성에 접근하는 느슨한 탐구방법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여기에서는 시나
리오 작법과 영화 문법 상에 있어 탄탄한 구조를 완성하는 것보다 오히려 느슨한 형태를 취하여
독자, 관객을 끌어들이는 쪽이 오히려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원래 의도가 그랬는지, 아니면
잘 해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허술하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 영화는 그러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서도 여러 주연들이나 상황에 있어 환상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단순히 재미를 위한 코믹한 장치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일상'을 돋보이게 하는 한 효과적
인 길이라고 여긴다.
아무튼, 이런저런 거창한 생각 없이도, 누워서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다리를 하늘하늘 꼰 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우에노 쥬리 특유의 '에에--?'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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