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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치가 가즈키, <노자의 변명>






먼저 한 줄 감상. 정가 만 이천 원. 사서 봤더라면 피눈물을 흘릴 뻔 했다. 이천 원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아까와

서 맑은 눈물 정도는 났을 것이다. 읽는 내내 <나는 금성에서 왔다>를 읽던 때의 기분이 생각났다.



애당초는 전공 서적 중 하나로 생각하고 접했던 것이다. 대학원에서의 내 전공은 한국 한문학이지만, 한국의 한

문학자들이 끊임없이 학습하고 담론과 발상의 근원으로 삼았던 것은 대부분 중국의 고서들이라 나는 기실 중문

학 쪽의 책들을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이러한 고서에 있어 한문 공부의 전통적 방법론은 '(모르더

라도) 백 번을 읽다보면 뜻은 자연스레 드러나기 마련이다(讀書百遍意自現)'인데, 천성이 꾀바른 나는 항상 더

쉽게 배울 길은 없는지, 더 재미있게 해석해 놓은 책은 없는지 눈을 희번덕거린다. 다행히도 근래에는 젊은 한

문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원문을 현대적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아예 새로운 관점으로 내용을 재해석하는 작업들

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려니, 하고 주목한 것이다. 일단 텍스트부터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노자인데, 그걸 다시 '성(性)'의 코드로 풀겠다니! 대출예약을 걸고 순서가 돌아오기만을 동

강동강 기다렸다.



남의 책에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긴 하지만, 받아본 결과는 완전 꽝.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

다. 저자는 중국고대철학을 전공한 일본인인데, 중국 운남성을 여행하다가 한 오지 마을에서 노자의 가르침은

실은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부족 단위의 집단을 만나게 된다. 그는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장로에

게서 노자가 쓴 책(이라고 전해지는) <노자도덕경>(이하 <도덕경>)의 새로운 해석을 전수받고, 이후 집단 제

례를 목격하고 거기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면서 일종의 영적 체험을 겪으며 참된 섹스가 곧 천지만물과 합일하

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본래 내가 기대했던 것은 원문과 기존의 해석, 그리고 새로운 해석과 그 근거가 차례대로 제시된 학술서, 혹은

일종의 대안 번역서의 형태였지만, 그런 부분은 본문 중의 두어 장과 부록으로 붙은 열댓 장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쪽 가량은 앞서 요약했듯이 여행 에세이에 가깝다. 그것도 사진 한 장 없는. 전공자들에게는 유머 책을 읽는

셈 삼아 한 번쯤 읽어 보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비전공자들에게는 정말로 권하고 싶지 않다. 노자는 됐고

참된 섹스란 무엇일까만이 궁금한 이들에게도, 유희의 방법이라거나 특히 깨달음을 얻기 좋은 체위라거나 하는
 
등의 자세한 정보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황당한 이야기라도 하나의 주장이라면 근거는 있을 터. 여기서부터는 책에서 제시하는 근거들을 정리하

여 붙여두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보자.



<도덕경>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1장의 처음으로, 그 원문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다. 중국의 고

서들은 표기 상의 문제로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도덕경>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난

해하기로 이름이 높다. 대체로 통용되는 위 문장의 번역은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도(불변의 도)가 아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상명(불변의 명)이 아니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핵심적 개념용어인 도(道)가 사실은 도(擣)의 차자(借字)라고 주장한다.


- 차자(借字)란 글자를 빌려쓴다는 것으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원래의 글자 자리에 뜻이 같거나 음이 같은 글자를 대신 넣는 행위

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언어 유희를 위해 '시베리안 허스키'를 '시베리안 허숙희'로 쓰는 것
따위도 일종의 차자라고 할 수 있다.

더 보편적인 사례는, 표기 체계가 다른 외국 용어들을 받아들일 때 자국의
글자로 바꾸어 쓰는 경우이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

일 때 본래의 산스크리트어 단어들을 보살, 아라한 등의
한자 단어로 표기한 것이나, 서양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를 아라사, 프랑스

를 불란서로 표기한 것 등이 좋은 예
이다.


장로가 지은이에게 설명한, 노자가 도(擣)를 도(道)로 차자한 이유는, 도(擣)라는 단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당

시 사회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擣)는 오늘날 절구를 찧다, 찌르다, 창으로 찌르다, 정

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이것이 섹스의 은어로 쓰였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위의 원

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섹스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섹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불변의 섹스는 그것을 나타낼 이름조차 없다.'


장로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한다.


'인간은 진정으로 우주와 하나로 연결될 때 육체적인 섹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인 극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네. 그것은 고대 현자들이 계속 말해온 것과 같은 우주만물과 합일한 경지이

지. 이 만물일체감이란 어떤 것인가를, 노자는 섹스의 엑스터시를 힌트로 전달하고자 했네. 이러한 시간과 공간

을 초월한 엑스터시를 섹스를 하지 않고 경험할 수 있는 것, 게다가 끝없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노자는

'상도(常道)'라고 표현한 것이네.'



성행위와 거기에서 얻어지는 엑스터시를 통해 신적 존재와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나 북남미의

원시 종교 뿐 아니라 고대 힌두교에서도 발견되는 일종의 종교적 사상이고, 그것은 각종 기록과 미투나 등의 예

술작품 등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고대라고는 하나 중국과 인도는 사상의 교류가 완전히 불가

능한 물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노자가 그러한 사상의 세례를 받았는지 등에 대한 증명

없이 단지 차자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언정 설득력 있는 언술이라고 보

기는 어렵다.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도,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술했듯이 중국의 고서들은 대단히 간명

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끼워맞출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논리라면 실은 도(島)를

차자한 것으로 섬의 지리 사항에 관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든지, 도(圖)를 차자한 것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에 관해 훈계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차자의 중의적 대상이 섹스라는 자극적

인 소재이며, 그로부터 발원한 제례 의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등의 기록이 뒷받침되어 있어 조금 더 눈길이 가

는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재미는 있었던 해석 한 가지만 더. <도덕경>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도(道)'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

의 중요한 단어는 바로 '덕(德)'이다. 도(道)가 실은 도(擣), 즉 '찌르는 것'으로 '남성기'를 뜻한다고 했던 장로

는 아니나 다를까 덕(德)은 본래 두(竇)로,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竇)는 구멍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 책에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는데, 우리 말로는 발음이 전혀 다르지만, 중국어로는 dé와 竇dòu로 발음이 매우

흡사하다. 이
발음은 현대 북경어를 따른 것으로 고대 중국어에서는 더욱 비슷했을 가능성도 있고, 혹여 오늘날만큼 비슷하지 않

았다 할지라도 고대의 차자는 그 기준에 있어 대단히 관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즉, 적어도 두 글자가 차자 관계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덕에 관한 <도덕경> 21장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은 보통


'커다란 도덕의 모습은 오로지 도를 따르는 것이니 도라는 것은 워낙 미묘하여 그 속내를 헤아려 알 수 없고 희

미하고 깊숙하여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안에 법칙이 있다. 희미하여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안에 온갖 만물이 있고

그윽하고 오묘한 가운데 모든 생명의 근원이 있다.'


정도로 의역되는데, 장로는 덕(德)을 두(竇)로 새겨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한다.


'여성의 성기의 구멍은 남성의 성기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의 성기를 넣으면 황홀해지며 모든 것을 맡기게 된

다. 정자를 방출하면, 그저 황홀해 그것을 받아들인다. 황홀경을 느낄 때야말로, 깊고 신비한 구멍 속에 정액이

방출되는 것이다.'




에라, 이 양반아. 그래도 재미는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