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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지승호/박노자, <좌파하라>

 

 

 

 

열흘 상간에 지승호 씨의 책을 네 권이나 읽게 됐다. 예약의 타이밍과 '도서관의 천사'가 겹쳐 일어난 우연일 수

 

도 있지만, 한 해에 책을 네 권씩 내는 저자의 왕성한 활동 덕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저자의 4월 작. 부제는

 

<자본주의는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좌파하라>를 읽기 전에 읽었던 저자의 다른 책은 양익준 감독과의 인터뷰집인 <Let's cinema party? 똥파리>였

 

는데, 하필 그 두 권이 그간 접해온 저자의 책들 중 인터뷰이와의 온도에 있어 가장 큰 차이를 보여 흥미로웠다.

 

 

<Let's cinema party? 똥파리>에서 지승호는 인터뷰어라기보다는 양익준의 팬이거나 친구에 가깝다. 여기에는

 

인터뷰가 이루어지던 시점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모두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겪고 있었고 마침 서로가 서로에

 

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되어주었다는 점, 성장 환경과 그로부터 발원한 정신 세계에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 주요했을 것이다. 문자로 정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술이 익는지 밤이 익는지 모르고 정다운

 

대화를 주고받는 두 친구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한편 <좌파하라>는 인터뷰집의 전형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질문은 인터뷰 중 그때그때의 유기적인 흐름에 맞춰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미리 분량과 주제에 맞추어 짧은 형태로 던져지고, 답변은 문어체에 가까우며 내용이 완

 

결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인상은 대학 수업 중의 질의와 응답이거나 혹은 토론회, 공

 

청회에서의 담화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단 인터뷰어인 박노자 교수가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 재직 중이라

 

인터뷰가 영상 통신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나마도 일부분은 그의 바쁜 스케쥴 때문에 서면 상으로 이루어졌다

 

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박노자라는 인터뷰이의 특이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박노자는 한국의 지성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한국사학을 전

 

공한 그는 본디 평양으로 유학하는 것을 더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북-소의 외교 냉각과 때마침 이루어진 남-소

 

외교 재개 때문에 서울 행을 택했다 한다. 한국 현대사 뿐 아니라 불교철학에도 해박하며, 엄정하고 기능적인 글

 

쓰기에 있어 '외국인임을 감안하고' 따위의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한국의 지식인 가운데 손꼽히는 필력을

 

보여주었던 벽안의 외국인. 선뜻 귀화를 택하여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는 다시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

 

국학 교수가 되어 한국을 떠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각종 기고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 애정어린 질타를 아끼지

 

않았고 올해의 4월 총선에는 홍세화 씨가 대표로 있던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6번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날 때부터 한국인었으니까 한국인으로 살고 있을 뿐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의 선택으로 한국인이 된 그가 모

 

국에 더 큰 애정을 갖고 더 많은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배타적

 

순혈주의와 특히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이 대체로 한국 사회 내에서는 극좌에 해당하는 점 등이 어우러져, 그에

 

대한 시선은 같은 귀화자인 할리나 이다도시에게 향해지는 것에 비해 몹시도 차가운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한국

 

사회 전반을 비롯해 특히 그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의 진보 정치 세력에도 쓴소리를 감추지 않아, 그나마

 

소수인 진보 정치 세력 내에서도 다시 소수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말과 글은 '나는 한국인이니까 한국을 더 사랑해'라든지, '나는 노무현을 찍었으니까 진보야'라

 

든지 하는, 증명되기 어렵고 막상 증명해 보면 아마도 진실에서 아주 멀, 그런 애매한 생각을 갖고 스스로 만족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애당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유수한 지성인들에게도 인정 받은 필력에 정연한 논리

 

를 갖추고 따져 오니 말로는 게임이 안 되고, '원래 외국인이었던 사람이 뭘 알아'라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자니

 

자기가 찌질해지는 것 같다. '내가 한국 더 사랑해'라고 말하려 해 봐도, 나는 그저 별 수 없이 이 땅에 살고 있을

 

뿐이고, 그는 십 년 째 타지에 나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한국학 교수이다. 유일하게 반격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좌파적 주장과 지향점이 대단히 이상적이어서 한국적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 정도인데, 이 또한 그는 '꿈꾸

 

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식의 격언으로 피해 간다. 구구절절이 옳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일 테다. 지승호의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박노자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망한 러시에서 와서 웬 시대착오적인 얘기

 

냐. 소련으로 가라'라는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를 진보적 성향이라 말하는 사들도 '박노자의 의견은 너무 래디

 

컬해서 싫다. 듣다 보면 기분이 나쁘다'라 말한다 한다.

 

 

 

 

 

나 또한 그의 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축은 아니었다. 그의 저서를 대부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책에 접근

 

하는 자세는 대체로 그 내용과 시각에 동의한다기 보다는 유려한 문체와 논리를 즐기는 탐미적인 것에 가까웠

 

다. 어쨌든, 한 군데라도 정은 붙이고 손에는 쭉 들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책은 읽으며 몇 차례나 자세를

 

바꿀 정도로 유난히 불편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비판은 일관된 그의 주제의식이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인터뷰의 시점이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들이 모여 통합진보당을 이루

 

었고 진보신당은 다소 암울한 미래의 독자적 행보를 시작했던 때였기 때문에 그의 말이 더 날카로웠던 것일까,

 

그 날카로움에 내가 더 불편해진 것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는 홍세화 대표의 진신당이 외로

 

운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았고, 진보신당의 주축 세력이었던 노회찬, 심상정이 탈당하여 '자유주

 

의자'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소아병적 민족주의자' 민주노동당과 합당을 이룬 것에 저주의 말을 퍼붓지도 않

 

았다. 그저 홍세화 대표와 진보신당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겸손한 한 마디, 그리고 (결국 사실로 드러난

 

것처럼) 통합진보당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담담한 예측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지승호 또한

 

그 유난스러워진 불편함에 의문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 의문에 박노자는, 자신이 래디컬해진 것아니라 한국

 

사회가 너무나 보수화된 것이라 대답했다 한다.

 

 

 

 

 

사오 년 전 MBC에 <명랑 히어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 <라디오 스타>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그 패널들에 몇 명의 패널을 더 붙여 만들어낸 일종의 스핀오프 프로그램이었는데, <라디오 스타>가

 

전형적인 연예인 토크쇼의 포맷이었던 반면 <명랑 히어로>는 시사 문제에 관해 패널들이 난장 토론을 벌이는

 

시사교양 포맷에 가까웠다. 본래도 시사 개그에 일가견이 있었던 김구라 씨에, 유머의 난장 가운데에서도 합리

 

적인 주장을 낼 줄 알았던 윤종신 씨, 우리 사회의 평범한 보수 지향 세력을 대변했던 이경규 씨 등의 캐릭터가

 

어우러져 무척이나 즐겁게 시청했던 경험이 있다. 2008년 초부터 방송을 시작했던 만큼 당시의 화제였던 촛불

 

시위, 영어 몰입화 교육, 얼리 버드 광풍 등이 주제로 다루어지다가, 20여 회가 지난 뒤 갑작스레<놀러와>와 비

 

슷한 포맷의 연예 토크쇼로 성격이 확 바뀌었고 1년이 지난 뒤 폐지되었다. 토요일 밤 열한 시의 그 자리에는 전

 

연령층 혹은 4,50대 주부층을 겨냥한 <세바퀴>가 새로 들어갔다.

 

 

1년쯤 지났을까, 문득 예전의 그 웃음이 그리워 iMBC에 돈을 내고 <명랑 히어로> 전 화를 다시 다운받아 본 나

 

는 몇 회 지나지 않아 시청하는 내내 가슴이 뛰는 자신을 발견했다. 2008년에는 공중파에서 연예인이 웃고 떠들

 

었던 그 내용들이, 2010년에는 듣는 것만으로도 잡혀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내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

 

요일 밤 팬티만 입고 거실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듣던 그 프로그램은 이제 내 하드 깊숙한 곳 엉뚱한 이름의

 

폴더에 숨겨져 이따금 간첩 접선하듯 재생되곤 한다.

 

 

 

 

 

그런 것일까. 박노자가 더 왼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른쪽으로 치달은 것일까.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도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을 듣다 보니, 홍수가 날 위험이 더 커지고 녹조가 창궐하는 사업에 22조를 쏟아 붓

 

고도 친환경 생태 산업이었다는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더 둔해진 것이었을까. 저쪽 편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을 향한 말들에서도, 일단 정권을 잡아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 너무 많이 되뇌었던 것일

 

까. '쫄지마 씨바'라는 날개를 달고 활공하는 재미를 만끽하다 보니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로 착륙해야 할지도 모

 

르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미사여구를 써먹기 위해 의문형으로 끝낸 것은 아니다. 나는 진짜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그렇다'와 '아니다'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하려면, 꽤나 공부하고, 생각해

 

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의문들을 갖게 하는 점에 있어, 설령 그와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한국 사회

 

에 박노자의 존재 의의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지적이 목에 와 닿은 선득한 칼날과 같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불편한 것은, 그래서 오히려 고맙다. 불편해지기를 귀찮아 않는 이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