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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최장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몇 달 전의 일이다. 지인과의 대화 중에 '교사는 노동자인가'라는 새로운 화제가 나왔다. 나는 '당연하다'라고 답

 

을 했는데, 신성한 교육의 행위를 어떻게 노동으로 볼 수 있느냐는 반응을 받았다. 시간 되면 출근하고 업무가

 

안 끝나면 야근을 하고 몸이 아프면 휴가를 내고, 그 노력의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이 노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는 요지의 의견을 펴 보았지만 설득은 성공하지 못했다. 교육을 신성한 행위로 간주하고 교사를 노동자 이상의

 

무엇으로 숭앙하는 것이 일견 교사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사가 노동자로서 간취해야 할

 

당연한 권리들을 주장하는 데에 더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는 주장도 먹히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화의 끝에 나는 아마도 빨갱이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내가 사교육과 공교육 일부의 구성원으로서 교사라는 직종에 대해 나름으로 고

 

민해 온 역사의 표현이었고, '노동'이라는 용어에는 나도 무의식 중에 적잖게 거리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

 

다. 전혀 다른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갑자기 '당신은 노동자입니까'라고 물어오면, 나는 아마 적어도

 

1,2초 간의 휴지를 두거나, 아니면 '제가 생각하는 노동이란' 등의 구차한 설명을 덧붙일 것이다. 이러한 거리감

 

의 기저에는 아마도 보수 언론의 목소리를 통해 비판 없이 받아들인 '노동'의 왜곡된 이미지들이 적체되어 있을

 

이고, 노동이란 용어에 대한 공부와 성찰이 없었던 무지 또한 편견을 굳히는 데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대단히 특수한 경우를 제하고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하다 못해 다국적 자

 

본을 등에 업고 개발도상국을 습격하러 가는 마우스 클릭 한 번도 엄연한 노동이다. 노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

 

를 떨 대기업 임원진의 치를 떠는 행위도 노동이긴 마찬가지이다. 노동은 살아가기 위한 재화를 획득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때로 자기 실현의 통로이기도 하다. 쉽게 다시 풀면, 일해야 돈을 벌고 일하면서 이따금 성취감

 

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인데, 이건 누구한테나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쉽게 풀면 상식인데, 단어로 압축하

 

면 거감이 생긴다. 이상한 일이다. 왜 그럴까.

 

 

 

 

 

며칠 전 문재인 후보를 응원하며 대선 후보에서 사퇴한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그 중요한 이유를 교육의 부

 

재에서 찾았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특히 우리 중 대부분은 '불로 소득', 즉 노동하지 않고 얻는 소득

 

과 별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노동에 관한 지식은 교양이 아닌 필수이고, 따라

 

서 공교육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이다. 옳다. 체세포 분열이나 삼각함수, 오솔레미오나 공무도하가 등의

 

교양도 혹여 어딘가에 도움이 될까 싶어 배우는 판에, 누구라도 해야 하는 노동에 대해서는 왜 배우지 않는단 말

 

인가. 잠깐만 검색해 보아도, 경제를 포함한 여러 면에서 우리 앞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초등 교육부터 노동의 개

 

념과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학교에서 노동에 대해 배우고 집에 와 내게 궁금한 점들을 묻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 전에 태

 

어난 신세로서는 어쨌든 혼자서라도 찾아 읽고 배우는 수 밖에 없다. 그 길에 만난 한 길잡이. 원로 진보 학자 최

 

장집 교수의 10월 신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다.

 

 

 

 

 

장점 하나. 읽기 쉽다. 책의 2/3 정도를 차지하는 1부 '삶의 현장에서 보는 한국 민주주의'는 저자가 직접 여러

 

노동의 현장들을 찾아 그 현황과 문제점을 고찰해 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는 아마도 우리 중 대

 

부분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릴 법한 중공업 관련 육체노동도 있지만,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청년 비정규직도 있다. 현장의 체온이 실린 목소리는 노동이라는 단어에 부어진 악의의 쇳물을 걷어낸다. 2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는 각 현장에서 개별적으로 관찰되었던 문제들이 실은 구조적이고 유기적

 

인 것임을 밝히고, 앞으로는 어떤 인식이 생겨나면 좋을지에 대해 언급한다.

 

 

 

 

 

분량이 길지 않고, 수치를 통한 분석이나 치밀한 역사적 고찰은 없기 때문에 학술적 접근을 원했던 분이라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진보의 일각에서 왜 '대통령이 바뀌어도 내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지

 

궁금했던 분이라면 공부의 첫걸음으로 삼기 훌륭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에 '노동' 과목이 생긴다면

 

딱 이 책이 교재로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