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다 보면 딱히 대학원에서의 주전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반드시 공부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분야가 있다. 최근의 몇 년 간 나는 주로 그런 분야의 책들을 읽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씩을 리스트에서 지워 나가는 동안 끝내 도전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주제들이 몇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방 직
후의 한국사이다. 식민지 시기는 전공인 한국 한문학에서도 어느 정도의 연구들이 진척되어 있어 전공 공부의
일환으로 접할 수 있었고, 6.25부터는 한국 현대 소설을 강의할 때 작품과 연계하여 설명하면서 스스로 다시 한
번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해방 전후부터 6.25까지는 무슨 책으로 첫걸음을 떼어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우연한 기회를 만나 추천받았다. 사학자 김기협 씨의 10권 예정 시리즈 중 제 1권. 부제는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김기협은 서울대 사학과 교수이자 해방 전후와 6.25 전후의 수기를 묶어 <역사 앞에서>라는 일기문을 출판하였
던 김성칠 씨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학자가 되어 많은 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예순이 넘었을 때에
이르러 '여생을 바치기 쉬운' 이 집필에 착수하였다.
<해방 일지>는 <역사 앞에서>와 같은 일기 형식을 취한다. 1945년 8월 2일 '포츠담 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을
시작으로 하여 하루나 이틀 차이로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꾸준히 적어나간다. 당대의 혼란스럽고 한편으로 다
양하였던 군상과 현상을 이념의 잣대로 재구성하지 않고 최대한 원상에 가깝게 복구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선택
된 방식일 것이다. 그 결이 얼마나 촘촘한가 하면, 430페이지 분량의 1권에서 진행된 시간은 45년 8월 2일부터
같은 해 10월 29일까지의 90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형태를 유지하겠다는 집필 의도를
지키기 위해 중간중간 가벼운 내용을 넣거나 저자의 개인적인 추억, 소회 등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읽어보
면, 해방 직후는 그야말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읽다보면 저자가 각별히 꼼꼼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쓸 것이 많아
서 이렇게 속도가 안 나가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이다.
하루하루 치의 일기는 작가가 편집위원으로 몸담고 있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실시간으로 연재되고 있다.
그 성실함은 연재가 시작된지 1년 반여가 지난 지금까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어서, 이 독후감을 쓰고 있는
11월 29일 새벽에 프레시안 사이트를 방문해 보니 1947년 11월 28일의 일기가 올라와 있었다. 현재는 1946
년 8월 30일까지를 다룬 4권까지 출간된 상태이다. 저자는 내년 8월에 탈고하는 것을 목표로 있다 하니 내년
말이면 10권 세트를 기약해 볼 수 있겠다.
아무리 불편부당하려 한다 해도 역사를 설명하면서는 어떤 자료를 취해 보여주느냐부터 이미 중립이 있기 어렵
다. 그래도 이 책은 최대한 많은 목소리와 여러 시각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 가운데 무엇을 갈
라낼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깜냥이라, 주장의 파악은 둘째 치고 사실관계만 숙지하는 데에도 세 번쯤은
읽어야 할 것 같지마는, 이 길을 따라 가면 건실한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든다. 학생들이 관심이
없는지 도서관에 1권부터 4권까지 난짝 있길래 일단 모두 빌려는 왔는데, 그림과 사진 없이 꽉꽉 들어찬 내용이
다 합치면 1,900쪽이 조금 넘는다. 이만한 분량 앞에서 질리기 전에 감사의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오랜만의 일
이다. 세트가 완간되면 신간으로 구입하고 주위의 청년들에게도 두루 권할 것이다. 이런 책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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