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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먼저, 돈 헤이즌(Don Hazon)의 추천사 중 일부를 인용한다.

 

 

 

2004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패배는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순간 모두가 의기소침해졌지만, 곧 엄청난 반향이 잇따랐다. 수백만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했다. 많은 이들은 단순히 강력한 반()부시 메시지로 유권자들을 겨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론 조사에서 예측된 바대로, 많은 미국인들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과 가치관에 투표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가치관에 대해 의사소통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존 케리는 사실에 기반한 통계 자료를 엄청난 양으로 제시하여 논쟁에서 이기고, 새로운 정책들을 내세웠지만 이는 승리로 연결되지 못했다...

 

...지난 2000년 우리 진보-독립 진영은 별안간 악몽을 맞이해야 했다. 대법원이 선거에서 조지 W. 부시의 손을 들어 준 이후 공화당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주류 보수주의에서도 한참 멀리 나가 있고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극단주의적으로 여겨졌던 생각이 국가 정책으로 탈바꿈한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얼마 전 끝난 19대 총선이 야권의 패배로 끝난 것임은 이제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패배의 원인으로는 여러가

 

지가 거론되고 있지만, 나는 그 가운데 '반MB 프레임'이 그닥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에 궁금증을 느꼈다. 많

 

은 시사평론가들이 지적하듯 '노무현 정권이었으면 하나하나가 탄핵 급이었을' 이슈들이 두자리 수로 급증하고

 

있는 이 때에, 논리를 넘어 당위적이기까지 한 이 프레임은 도대체 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을까. 김용민 막말

 

이 MB심판보다 훨씬 더 중요했단 말인가? '프레임'이라는 개념의 기본부터 다시 되짚어보기 위해 옛 독서의 기

 

억을 더듬어 수 년 만에 다시 잡은 이 책에서, 나는 위의 서문을 읽고 전율하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역사란 정녕

 

없는 것인가?

 

 

 

 

 

이 책은 돈 헤이즌을 비롯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역작이다. 조지 레이

 

코프는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라고까지 불리워지는 석학으로, 특히 미국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여러 논의를 펼

 

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주된 도구 중 하나인 '프레임(fram

 

e) 이론'에 관해 가장 쉽게 해설해 놓은 작품이며 그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책은 간명하게 두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 '그것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프레임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를 여러 정치적 사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설명하고, 2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진보 세력의 결집과 대응

 

필요한 요건, 그리고 그에 따른 제언들을 싣고 있다.

 

 

 

 

 

'프레임(frame)'이란, 저자의 주장을 거칠게 전달하자면,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어떤 틀이다. 우리는 이 틀에 맞추

 

어서 세상을 보게 된다. 새로운 정보들을 접할 때, 사람들은 그것들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자기

 

머리 속에 있는 프임과 부합하는 정보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만약 내가 어떤 사람들의 머리 속

 

에 내가 원하는 형태의 프레임을 짜 넣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 뒤로부터 내 발언이 행위와 일치되지 않거나 혹

 

은 거짓을 말하더라도, 나를 믿어줄 것이다.

 

 

제목인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이 프레임 이론을 쉽고 거칠게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저자가 버클리에서

 

수업을 진행할 때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낸 과제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아무튼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

 

는데, 과제에 성공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 프레임을 부정하려면 우선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이론은, 상징적인 비유와 구호가 난무하는 정치판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막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예를 들어, 부시 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바로 감세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자신의 이력

 

과 소속 정당의 정체성으로 보아 이 감세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주로 어느 계층에 분포되어 있을지가 명약관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에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순간,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사람들의 머리속에 새로운 '프레임'이 짜여진다.

 

 

 구제가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 -  고통을 없애 주는 사람은 영웅이다 - 그 영웅을 방해하는 사람은 악당이다

 

 세금은 고통이다                  -  없애 주는 사람은 영웅이다            - 방해하는 자는 악당이다

 

 

이런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나면, 민주당 쪽에서 '부시의 정책은 구제가 아니다, 이런이런 정책의 이런이런 점을

 

봐라. 우리야말로 구제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구제'라는 단어만

 

이 계속하여 울려퍼진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법칙의 유용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막대한 돈을 투자

 

해 왔다. 저자에 따르면, '2002년 우익이 연구비로 지출한 돈은 좌파의 4배'이며, '미디어에 노출된 시간 또한

 

그들의 4배'라고 한다.

 

 

 

 

 

공화당의 정책이 효율적으로 먹혀들어가는 데에는, '리버럴과 진보주의자'들이 순진한 탓도 있다.

 

 

첫째, 그들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충분한 진실을 알려 주면 항상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랬고, 지난 번 대선에서 MB의 당선을 초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두가

 

그랬다! 아니, 어떻게 BBK 동영상을 보고도 MB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할 때에 '대량 살상 무기' 운운했던 부시의 언급이 거짓말이었다고 아무리 말해

 

봐야,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의 프레임은 이 '진실'을 튕겨내 버린다. 그들은 '사담 후세인이 9/11의 배후'이고,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는 같은' 것이며, '이라크 전쟁에서 싸워 조국을 테러리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9/11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표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한 프레임을 갖고 있다.

 

 

둘째, '리버럴과 진보주의자'들은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므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람이라면 자기 이익에 기초하여 사고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빈곤층이 부시와 공화당에게

 

표를 던지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부시의 감세안이 상위 1%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했다. 그는 나머지 99%의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가난한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공화당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

 

체성에 따라 투표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 투표한다. (전자가 뉴타운 열풍이 불었던

 

2008년 총선이라면, 후자는 박정희라는 강력한 아우라를 등에 업은 박근혜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지금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이후로도 결혼, 테러 등과 관련해 어떤 단어들이 어떤 프레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에 대해 알기 쉬운 설명이 1부 내내 죽 이어진다. 2부에서는 단지 프레임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진보 세력이 어

 

떤 가치들을 위주로 결집해야 하는지, 그런 가치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구

 

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오늘은 특히 프레임과 관련해서만 독후감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보수주의의

 

용어들에 대항해 진보주의는 어떠한 단어로 새 프레임, 즉 판을 짜야 하는지에 관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진보주의 

보수주의 

 강한 미국 (Stronger America)

강력한 국방 (Strong Defense) 

 모두의 번영 (Broad Prosperity)

자유 시장 (Free Markets) 

 더 나은 미래 (Better Future)

낮은 세금 (Lower Taxes) 

 효율적인 정부 (Effective Government)

작은 정부 (Smaller Government) 

 상호 책임 (Mutual Responsibility)

가족의 가치 (Family Values) 

 

 

 

옳다! 당최 '자유 시장을 반대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물어 오면, 잘못 대답했다간 빨갱이 되는 거 아닐까 싶어

 

땀이 줄줄 날 것만 같은데, '모두의 번영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특

 

정 세력의 번영만을 위한다는 느낌이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뻥, 하고 온다. '작은 정부'에 맞서 '큰 정부'를 운

 

운했다가는 큰 정부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상기시켰던 복지 패망론 등의 비난이 당장 날아올텐데, '효율적인

 

정부'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 반대는 비효율적인 정부. 그렇지. 생각해 보면 작으니까 별로 할 수 있는 일도 없

 

고 힘도 없겠지'같은 인상이 스르륵 하고 한번에 흐른다. 이거다, 하는 느낌이 실제로 온다.

 

 

 

 

 

다만, 대단히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말을 꾸미면 저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라는 생각

 

이 무의식적으로 드는 것은, 나도 계몽주의의 덫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우리가 계속해서 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없으니만 못한 그놈의 염치' 때문인 것은 아닐까? 누가 뭐래도 곽노현을

 

지지하고 일단 이정희 앞에 서서 방패로 화살을 막아주었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여러가지 질문을 낳는, 좋은

 

책. 안 읽어보셨다면 일독을 강권한다. 조만간 조지 레이코프의 다른 저작들도 차례로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