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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오가와 히토시, <철학의 교실>

 

 

 

 

한 줄 평. 쉬워서 즐겁다.

 

 

이 책은 '죽음', '연애', '행복' 등과 같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문제들에 대해,

 

그 문제를 깊이 탐구한 열네 명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들의 사상을

 

요약해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서 쉽게 전달하려고 한 것이 이 책의 뛰어난 장점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가장 인상적인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장치. 철학자들은 일본의 어떤 교실에 '직접' 등장하여 인물들의 구체적인 고민에 답한다. 예를 들어 선

 

생님께 혼나서 성질이 난 고등학생 앞에 미셸 푸코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권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

 

식이다. 이러한 소설적 형태는, 저자가 직접 고민에 답하다가 철학자들의 원론을 거론하는 방식보다 -다소 유치

 

하긴 하지만- 훨씬 친숙하고 또 재미있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강의를 하지만, 때로 내용의 진행상 그들

 

의 핵심 개념어들을 설명해야 하는 때가 있는데, 분위기가 딱딱해질 수 있는 이런 때에는 '필기'라는 장치가 사

 

용된다. 

 

 

 

요런 식. 왼쪽은 헤겔 선생님, 오른쪽은 칸트 선생님.

 

 

이 '필기'의 행위 앞에는, 반드시 '하이데거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칠판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라든지 '그렇게

 

말하고 헤겔은 분필을 한 손에 들고 이야기를 꺼냈다'와 같은 소설적 묘사가 덧붙어 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실

 

제 '역사' 속의 '거대한 지성'들이 말한 '어렵고 위대한' 개념어가 갑자기 튀어나왔다기 보다는, 삶의 구체적인

 

고민들에 대해 쭉 친근하게 설명을 이어 온 강사가 자기의 말을 잘 정리하려고 잠깐 적는 어떤 단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든다. 즉, 철학자가 실제로 내 앞에 와서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 '소설적 환상'이 깨어지지 않는

 

이다. 

 

 

 

한 차례의 강의가 끝난 뒤, 철학자들은 편지지에 짧은 '메시지'를 적어 전달한다.

 

 

 

 

상냥한 헤겔 선생님.

 

 

강사와 학생 간에 오고가는 따뜻한 메모. 실물보다는 덜 따뜻하겠지만 아무튼 충분히 훈훈한 모습. 내가 강의를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몰입한 것일까? 아무튼 이 장치는 책 내에서 강사와 학생들 간에 유대 관계를 보여주는 데

 

에 유용하게 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삶의 질문들에 철학은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한 줄 요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장치. '철학의 교실'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인물에게는 '캐릭터'가 있다. 세 명의 고등학교 2학년은 서

 

로 친구 사이로 '우등생', '미인', '불만쟁이-토론가'이고, 30대 중반의 미혼 직장인인 '영화광'과, 말 안 듣는 아

 

이들과 무관심한 남편에 지쳐 만사가 귀찮아진 40대 초반의 주부가 있다.

 

이들은 '선생님에게 질문하거나 선생님과 토론'하는 행위를 통해 각기 캐릭터에 따른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우등생'은 선생님이 다소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비유법 등을 통해 '선생님 말씀은 이런 것이죠?'라

 

고 해설한다든지, 선생님의 논의를 한층 더 심화시키는 형이상학적 질문 등을 던진다. '불만쟁이-토론가'는 선생

 

님이 자기 이론의 전제를 설명하고 나면 '선생님. 그런데 이런 건 잘못된 것 같아요'와 같은 쟁점적인 질문을 함

 

으로써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는 기점을 만든다. 영화광은 강의 전체의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는 영화 제목을

 

대고 관련된 지식을 뽐내면서 독자에게 해당 주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2차 자료의 정보를 제공한다.

 

 

 

 

 

이번엔, -즐겁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단점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각 장치에 대한 불만을 적어보자.

 

 

 

 

 

첫번째. '철학자' 장치에 대한 불만. 기껏 여러 장치를 통해 친숙하게 만들었는데, 열네 명의 철학자들을 서로 구

 

분할 수 있게 하는 개성이 전혀 없다! 무척 아쉽다. 챕터가 시작할 때 철학자의 캐리커처가 한 장 실려있기는 하

 

지만, 더 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등장의 방식이라든지, 어투라든지, 필기의 글씨체라든지, 등등.

 

마르크스가 신경질적으로 신용카드사의 독촉 전화를 끊으며 교실로 들어왔다거나, 칸트 선생님이 모델처럼 꼿

 

꼿한 걸음걸이로 교실을 왔다갔다하며 이야기를 끌어나갔다거나, 레비나스가 칠판에 필기를 하다가 끼-익 소리

 

를 내고는 돌아서서 '죄송합니다'라고 격식을 갖추어 인사를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캐릭터를 더 잡아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열네 명의 철학자는 말투도, 논의를 진행시키는 방법도 똑같다. 저자가 이름표만 바꿔 단 꼴이라고 해

 

도 좋다. 비록 소설적 형식을 차용했지만 그들의 캐릭터를 새로 만들 정도로까지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철

 

학자의 학문적 양심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장치, '인물들'에 대한 불만. 360쪽 가량에 14개의 챕터가 들어가야 하고, 분량상 한 챕터 안에서 한 캐

 

릭터가 몇 번씩 질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기껏 캐릭터의 설정까지 정해서 추리소설처럼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로 소개까지 한 것 치고는 그리 많이 써먹지 못했다. 예를 들어 '미인'에게는 '우등생'을 몰래 좋

 

아하지만 연애 자체를 두려워 한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 설정은 고작 플라톤의 '연애' 강의를 듣고 자기 감정을

 

긍정하게 되었다는 몇 줄에만 쓰였다. '영화광'은 30대, 미혼, 직장인이라는 현실적인 캐릭터는 거의 쓰지 못하

 

고 영화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에만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불만쟁이-토론가'에게는 우등생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는 설정이 있지만 별로 부각되지 못했는데, 굳이 소년을 둘 씩이나 쓰지 말고 이 캐릭터를 '우등생' 캐릭

 

터와 합쳐서 '미인'과의 갈등 관계를 형성시켰더라면 좀 더 소설적 긴장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총평. 한 권 안에 철학자들의 사상 중 핵심 부분만을 쉽게 전달한다는 기획의도. 거기에서 비롯된 태생적 한계이

 

긴 하지만, 아무튼 '행복'이나 '죽음', '인생'등에 대해 실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답게 살아라'나

 

'고민을 멈추면 반드시 행복해진다' 등의 메시지를 통해 서양 철학 원론을 짧게 소개하는 건 그리 마음에 와 닿

 

지 않을 것 같다. 삶의 구체적 고뇌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심리학 서적이나 철학 에세이 등을 찾고 있는 사람이

 

라면 피해서 가실 것. 이 책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들을 품기 시작했으나, 어떤 주제

 

에 대해 생각하면 좋을지, 또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면 좋을지, 공부를 하려면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등에 의

 

문을 갖는 청소년, 대학생 등이 읽으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따금 철학 이론을 언급하면서도 대체로 시정

 

의 언어로 연애사, 일상사 등에 감칠맛 나는 조언을 주던 철학박사 강신주 씨의 라디오 상담을 떠올리며 즐겁게

 

읽었다. 다음 번에는 철학자의 수를 줄여 강의의 수준을 심화시키고, 캐릭터를 잘 부여해 재미를 높이고, 이미

 

만든 다섯 인물의 설정들을 더 잘 살린 후속작이 나와 주길, 바란다. 진짜로 기대하고 있다. 나와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