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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마틴 린드스트롬,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추천받아 읽었다. 표지날개의 안내에 따르면, 저자인 마틴 린드스트롬은 '존경받는 브랜딩의 권위자이자 브랜드

 

미래학자'로, '일 년에 300일 정도를 전 세계로 출장을 다니면서 수많은 CEO와 유명인, 심지어 왕실을 위해 자

 

신의 지식과 혁신적인 방법론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2009년 유례 없는 경

 

기 침체의 한가운데서', '지난 20년 동안 마케팅과 브랜딩 전쟁의 최전선에서 목격했던 수많은 속임수와 음모를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별로, 예쁘지는 않다. 20년이 넘게 '브랜드'로 돈 잘 벌어먹고 이제와 폭로를 해서 잘 살아보시겠다? 게다가 저

 

자의 다른 책 중 하나는 WSJ에 의해 '최고의 마케팅 도서 10'에 선정되었으며, 본인은 2009년 '신경과학과 브

 

랜딩 분야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됐다고

 

하니, 브랜딩에 관한 속임수와 음모를 폭로하겠다는 고운 말일랑은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브랜딩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지키면서 업계의 음모를 폭로하겠다는 이 모순적 기획은, 책 속에서는 놀

 

랍게도 잘 구현되어 있다. 타사의 브랜딩은 진실을 은폐하여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음모'로, 본인의 브랜딩

 

은 전설적인 성공의 결과를 가져온 창의적 시도로. 읽어본 뒤의 내 생각으로는, 이 형은 아마 직접 만나 물어보

 

면 '뻔뻔해져야지'라는 자의식조차 없을 것만 같다. 내 건 당연히 브랜딩. 네 건 당연히 허위광고 혹은 사기.

 

 

 

이렇게 기획이 뻔한 책을 읽을 때엔 독서의 목적이 확실해져서 오히려 즐거운 면이 있다. '음모'로 까발려진 재

 

미있는 정보만 잘 섭취해서 정리해 두고 책은 다시 안 보면 된다. 그래서, 오늘의 독후감은 읽으며 흥미로웠던

 

정보들만 이 뒤로 주루룩 정리하고 끝. 음모론 도서들을 선호하거나, 혹은 쇼핑에 대한 가벼운 즐길 책이 필요

 

한 분들께 열없이 권장.  

 

 

 

- 아시아의 한 거대 쇼핑몰에서 산모를 대상으로 하여 어떤 테스트를 행하였다. 의류 매장에는 존슨&존슨즈 베이비파우더를 뿌리고, 식품 및 음료수 매장에는 체리 향기를 뿌리고, 산모들이 태어날 적에 유행했던 편안한 노래들을 틀어놓았다. 쇼핑몰 경영진은 이러한 시도가 산모와 관련된 매출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도 함께 나타났다. 이 감각적인 실험을 한 지 일 년 정도가 지나, 흥미로운 현상을 보고하는 편지들이 엄마들로부터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들은 아이들과 함께 그 쇼핑몰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아이들이 차분해졌다고 편지에 썼다.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던 아이들이 그 쇼핑몰에 들어오면 신기하게 조용해졌다.

 

 

- 손 세정제 시장 규모는 미국에서만 4억 2천만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많은 연구 결과들은 항균 세정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신종 인플루엔자와 사스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바이러스들은 공기 중 수분 입자를 타고 전파된다. 즉 감염된 사람들의 재채기나 기침에 의해, 또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오염된 물체를 접촉한 손으로 눈이나 코를 문지를 때 전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에 대한 전세계적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세계 최대 세정제 생산 기업인 Purell의 매출은 50% 성장했고 Clorox 세척제는 2009년 이후 23%의 성장을 일구어냈다.

 

 

- 어떤 상품들은 소비자의 죄책감을 파고 들기도 한다. 오늘날 구운 스낵 제품들의 포장지는 건강을 염려하는 여성들의 '두려워하는 자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치토스 포장지가 미끄럽고 번들번들한 재질인 것에 반해, 구운 스낵의 포장지는 대부분 무광 재질이다. 번들거리는 포장의 무의식적 차원에서 기름지고 느끼한 피부를 연상시킨다.

 

 

- 매일 아침 신문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72%의 사람들이 맨 위에 놓인 신문을 들고 그 아래에 있는 신문을 뽑는다. 맨 위의 신문이 사람들의 손을 가장 많이 타서 제일 더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72%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뽑은 신문을 잠깐 훑어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계속해서 똑같이 손때 묻은 신문을 돌려보고 있는 셈이다.

 

 

- 우리는 마멀레이드를 살 때 신선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마멀레이드는 신선 식품이 아니다. 만들자마자 팔아야 하는 그런 식품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마케터들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싶었기 때문에, 병뚜껑에 흰 색 띠를 부착함으로써 신선함이라고 하는 '환상'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 띠가 온전하게 붙어 있다는 말은 아무도 뚜껑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텔 역시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호텔 직원들은 욕실 변기 뚜껑에 종이 띠를 감아두거나, 미나 바 위의 물 컵에 종이 뚜껑을 덮어놓는다. 보잘것없는 종이 한 장으로 아무도 그 변기와 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아이디어는 참으로 놀랍다. 이 띠를, 마케터들은 '신선 띠fresh strip'이라고 부른다.

 

 

- 마멀레이드 업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집에 와서 병을 딸 때 '뻥'하는 소리가 나도록 설계를 하였다. 이 소리는 지금 내가 산 제품이 신선하고,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물론 '뻥'소리가 실은 실험실에서 개발되어 특허를 받은 음향이라는 사실은 절대 알리지 않고 있다.

 

 

- 입술이 건조할 때 바르는 립밤의 박하향은, 멘솔 담배의 멘솔처럼 습관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기업들이 '민감성을 높이고 염증을 유발할 수 있는 향료와 방부제, 라놀린, 염료' 등 뿐 아니라 페놀이나 석탄산과 같이 입술을 더욱더 '건조하게' 만들 수 있는 성분들까지 추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립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스스로 수분을 보충하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입술이 더 빨리 건조해지기 때문에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립밤을 더 자주 발라야 한다. 1993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교수인 스티븐 프레이는 립밤의 페놀 성분이 말 그대로 입술을 마비시키고 나면, 티눈, 굳은살, 사마귀 같은 죽은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분인 살리실산이 살아 있는 조직인 입술을 괴사시킨다고 설명하였다.

 

 

- 오랫동안 마케팅 세상에서 일하면서 나(저자)는 한 가지 진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디도 아시아만큼 브랜드워시 작업이 잘되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루이뷔통은 기가 막힐 정도로 아시아 집단 문화의 허를 찔렀다. 그들은 일본 여성들 78%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파리에서의 결혼'이라는 꿈을 자극했다. 그들은 다른 지역보다 일본에서 유독 매장 디자인을 프랑스적인 느낌으로 설계했고, 프랑스 명찰이 새겨진 여행 가방들을 진열하였다. 루이뷔통의 우수 고객은 매장 내에서 프랑스산 모에샹동 샴페인까지 맛볼 수 있다. 루이뷔통 전체 시장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루이뷔통 홈페이지에서 어떤 언어를 선택하더라도 프랑스어로 전환하는 옵션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루이뷔통은 최근 제품의 상당 부분을 인도에서 생산하는데, '프랑스'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일본 시장으로 넘어오는 제품들만은 프랑스 제조로 채우고 있다.

 

 

- 최근 미국의 대형 마트인 Trader Joe에서 고급 초콜릿인 Ghirardelli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기존의 화려한 포장지와 번쩍이는 상자는 없고, 대신 예스러운 손 글씨가 적힌 커다란 갈색 종이 가방만 보였다.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크기가 제각각으로 잘린 초콜릿 '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마치 부부가 경영하는 가게에서 손으로 자른 듯했다. 그 모양새에서 뭔가 진정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라델리 두 봉지를 사가지고 와서 비교해보았을 때 나는 각각의 덩어리들이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덩어리들은 손으로 자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대량 생산된 초콜릿이었다.

 

 

- 스파키스라는 식품 체인은 200개에 이르는 매장들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에 따라, 소비자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쇼핑을 할 때 2달러를 더 소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으로 돌면서 쇼핑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른손잡이에게 물건을 집기가 더 편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른쪽에 정문을 만들어둔 것은 자연스럽게 반시계 방향으로 쇼핑 동선을 유도하려는 미묘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생각해 보니, 서울 연희동의 '사러가'를 포함해 내가 자주 가는 서너 군데의 SSM은 모두 입구가 오른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