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 등의 인터넷 매체에서 연재물의 형태로 접했었는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으러 갔다가 찾는 책 근
처에 꽂혀있는 것을 보고서야 책으로 묶여 출간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넷의 연재물과 제목이 똑같지 않았더
라면 조갑제 선생의 또 하나의 역작 쯤으로 생각하고 굳이 꺼내들지 않았을 터이다. 부제는 '한 NL 운동가의 회
고와 성찰'.
반독재와 민주화 시기를 걸쳐 96년 연대 사태까지, 개별 사건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갈릴 수는 있으나 적어
도 학생운동사에서 연세대는 분명히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2001
년에는, 연대의 학생운동사라는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탐구하지 않는 이상 평범한 학생으로 'NL'이나 'PD'등의
약어를 듣는 일은 흔치 않았다. 청소년기에 IMF를 겪었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지도 4년이나 지난 후에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에게는 민족 통일이나 자주 국방을 외치는 학생회보다는 시험기간 야식판매나 도서관 내 휴식
공간 증설을 제안하는 학생회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학생들 간의 학점 경쟁을 부추기고 관계망을 파편화시키
는 한편 세미나나 동아리 활동의 과외 시간을 앗아가는 부수적 효과까지 노렸던 학부제는 몇 년 간의 시행 끝에
이미 착실하게 뿌리를 내린 뒤였다. NL이나 PD가 학생운동 내의 정파를 가리키는 약칭이며, 나와 사랑하고 미워
하고 술을 먹고 노래방을 가는 90년대 초중반 학번의 선배들 중 대부분이 그 어느 쪽엔가 속해 있다는, 혹은 있
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바라며 처음으로 사회 공부를 시작한 때부터였
다. 입학하고도 2년여 후의 일이다.
하지만 책이나 기사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은 있어도 바로 그 때 바로 거기에 서 있었던 그 선배들
의 입으로부터 NL이나 PD의 이름과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취한 선배들에게 학생운동이 무엇
이냐, NL은 무엇이냐, 물어보면 돌아오는 것은 몇 개의 감정이 뒤섞인 긴 응시, 눈물, 알 수 없는 웅얼거림, 노수
석과 같은 몇 개의 이름들 뿐이었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이야기와 태도에 일종의 공포감과 외경감을 가
졌고,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섣불리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저런 공부를 한 뒤에는 전대
협이니 한총련이니 하는 단어들도,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라면 떠듬떠듬 대강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그래도 선배들의 응시에 들어있던 감정이 무엇이고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책은 아마도 나의 그 선배들과 어딘가에서의 시위 현장에서 반드시 한 번은 스쳤을 법한, 90년대 중반 학번
인 어떤 형이 쓴 책이다. 한 명의 신입생이 입학하여 졸업 때까지 겪게 되는 일련의 이벤트를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 때마다 오고가는 감정들, 고민들을 정리해 놓은 일종의 체험담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특정되어 있
지 않고, 감정이나 고민이 일어나는 인과 관계에 대해 설득력 있게 해설하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상식적이고 보
편적이라 볼 수 있으므로, 단지 한 명의 회고록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오독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목에서 NL이라는 호칭이 먼저 보이듯, 이 책의 주인공과 주된 세력은 NL이다. PD도 이따금 등장하기는 하지
만 NL과의 비교라는 기능적 목적에 한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라는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작가 스스로도 그 부분에 대해 시간을 들여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NL이 무엇인지 PD가 무엇인
지, NL이 맞았는지 PD가 맞았는지를 '분석'하는 것보다는 평범한 신입생이 어떻게 운동권이 되고 또 어떻게 주
사파가 되는지에 대해 '술회'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왜 주사파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사파
가 되었는가'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책의 주된 내용을 모두 이곳에 요약하는 것은 무리이다. 단
이 긴 내용을 전달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NL이든 PD이든, 정파를 창출하고 조직을 구획
하고 정책을 설립하였던 이들이 다 있겠지만, 90년대 중후반에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에게는 고마운 선배이고
농활의 추억이고 사랑스러운 후배였을 것이다. 투쟁의 역사이기 이전에 개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NL이라는 이
름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숙제이나, 거대한 담론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실은 수
많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고 관계였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술회', '회고'의 형식도 아마 그래
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은 복잡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보수 언론이나 보수적인 성향의 댓글에서
는 '전향을 선언한 빨갱이는 받아주자'나 '빨갱이도 인간이라는 심정적 호소를 하려는 수작'등의 의견을 읽을 수
있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진진한 술회라는 공감 외에도 올해 있었던 통합진보당 사태와 관련해 '하필 이렇게 여
론이 좋지 않을 때 동지의 등에 칼을 꽂나'라는 의견도 분명히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란 중립적인 것이고 접근
은 균형잡힌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분이시라면 이러한 논쟁적 저작을 굳이 읽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 의견 수준의 내용을 '이것이 가치중립적인 팩트다'라고 주장하는 한편에서, '이건
내 이야기이고 추억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 책의 목소리에 체온을 느꼈다.
운동권에 있었던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저자가 떠올린 감정은 '고독'이다. 사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소명감이 있
었고 주위의 사람들도 그 가치에는 공감하였던 80년대 학번들, 자기 인생을 찾아 사회에 관심을 끊거나 혹은 정
치 참여, 시민운동 참여라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낸 2000년대 학번들의 사이에서, 90년대의 운동권 학생
들이 느꼈던 것은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고, 어떤 때는 스스로를 설득할 수조차 없
어 동지와의 온정만으로 버텨야 하는 순간도 있었던, 고독의 한 때. 나를 쳐다보던 내 선배들의 눈빛 중 한 가지
는 고독이었을까. 찬찬히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남의 속이야 어찌 다 알 수 있을
까마는, 나는 이따금 술을 먹고 '그래도 90년대 선배들은 사회를 위해 뭘 한다는 만족감은 있었을 거 아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적어도 그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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