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집필한 나카노 교코의 최신작. 저자와 책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더라도, 온라인이나 오
프라인의 서점을 기웃거린 분이라면 다음의 그림이 들어간 표지를 기억하실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인데, 작가의 위상이나 그림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보다는 왼쪽 남성이 우리나라의 한 고위 공직자와 무척 닮아서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아무튼, 이 책은 전작들인 <무서운 그림> 시리즈의 연장선 상에 있다. 계속해서 작가의 작품들을 접해 온 사람들
은 소재가 되는 그림과 해설이 겹치는 것을 몇 차례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바뀐 새 편
집 방식에 맞춰 읽어나가는 재미도 색다르고,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림 읽는 공부라는 것이 반복하면
반복할 수록 조금씩 더 보이는 것이 있기도 하고 하니 다시 읽어도 딱히 후회될 것은 없겠다.
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은, 사실 '(알고 보면) 무서운 그림'들이다. 물론 보자마자 다소간의 이질감이나 선
득함을 느끼게 되는 그림들도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외양이나 정돈된 구도 등에
가려져 있는 섬뜩한, 혹은 비극적인 뒷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것은 단지 귀여운 아이의 초상화일 뿐이다. 머리 길이 탓에 사내아이인
지 여자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게는 상관 없는 일이고, 피부가 다소 창백해 보이지만 백인이니까 그렇
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굳이 눈여겨 볼 일이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것
은 아마 크리넥스 티슈곽에서나 새로 산 액자에 끼워져 있을 때 정도일 것이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면,
아이의 핏기가 적은 얼굴 한 편에 우울한 빛이 숨어 있고, 또 키나 머리 크기로 짐작되는 나이에 비해 묘하게 늙
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나카네 교코는 바로 이런 지점을 파고 든다. 미술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저 '옛날 그림' 정도로 여겨지
는 작품을, 독자에게 '읽어' 주는 것이다.
위 그림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이다. 당연히 주인공인 저 아이가 스페인의 펠리페 왕
자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아이는 4살 때 죽었다. 죽을 아이여서 그랬나보다, 하고 생각하면 어쩐지 쓸쓸
하고 감상적으로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초상화가 생전에 그려진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림 읽기 연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아이의 요절에 대해 나카네 교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로스페로 왕자가 속해 있던 스페인 왕
가는 고귀한 혈통끼리의 혼인을 중요시했다. 다른 왕국에 적합한 배우자가 있다 하더라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트 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선택지는 더욱 줄어들어, 현실적으로 스페인 왕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오스
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의 제후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도 한정된 국가 간에 수 세기에 걸쳐 혼사가 이루
어지다보니, 다른 국가에서 배우자를 맞아온다 하더라도 실제로 따져보면 근친인 경우가 많았다. 프로스페로 왕
자의 탄생은 5대 간에 걸친 근친혼의 결과물이었다.
나카네 교코의 자세한 설명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왕자의 고조 할아버지는 사촌누나와 결혼했다. 그 아
들인 증조 할아버지는 조카딸과 결혼을 했다. 아이의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 쪽이 나와 형제나 사촌 관계일 경우
조카라고 하지만, 이 조카딸의 아버지는 사촌형, 어머니는 친여동생이었다. 이중의 근친이었던 셈이다. 그 사이
에서 나온 왕자의 할아버지는 사촌형의 딸, 즉 조카딸과 결혼했고 왕자의 아버지 또한 조카딸과 결혼하여 프로
스페로 왕자를 낳았다. 선조가 어느 정도 근친교배를 하였는지 측정한 수치를 근친계수라고 하는데, 부모가 완
전한 타인일 경우 0, 부모가 자웅동체여서 혼자 한몸 교배를 하였을 경우 1이다. 우리 대부분은 0이거나 0에 가
까운 근친 계수를 갖고 있다. 현대 스페인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스페로 왕자의 근친계수는 무려 0.254였다고
한다. 근친간의 결혼이 자식 세대에 희귀한 질병을 유발하거나 면역력을 낮추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카네 교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프로스페로 왕자가 죽은 뒤 태어난 남동생, 즉 카를로스 2세는 어떠했는지
그 초상화를 소개한다.
악의적으로 과장된 것이 아닐까 싶게 병약한 인상이지만, 이 그림을 그린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는 궁정화가로
그러한 객기를 부릴 수 없는 처지였다. 직접 다른 초상화들을 검색해 보니, 그나마 이 그림은 와중 가장 정상적
인 인상에 가까워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카를로스 2세는 정신 쇠약의 증세를 보였으며 생식 능력이 없었고
29세에 요절한다.
다시 프로스페로 왕자의 초상화로 돌아가 보면, 근친혼과 같은 역사를 잘 알아두지 않아도 그림에는 불길한 징
조들이 몇 가지 드러나 있다.
왕자가 입고 있는 것은 여자아이의 옷이다.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신분이 높은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의 옷을
입어 사신이나 마귀의 눈을 피하는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까운 일본에도 그러한 풍습이 있다. 그런
데 왕자의 이 아동복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당시 스페인에는 따로이 아동복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때그때 몸 크
기에 맞추어 어른들의 옷을 줄여입힐 뿐이었는데, 그 모양새를 맞추기 위해 아이에게도 코르셋을 입혔다고 한
다. 왕자는 저 옷 아래 꽉 끼는 코르셋을 입고 있는 셈이다. 코르셋은 성인 여성에게조차 심폐 기능이나 소화 기
능에 지장을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약한 출신이었던 왕자가 그러한 코르셋을 입는 것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리 없다. 왕자는 몇 차례나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작가는 이 코르셋에도 다소간의 혐의가 있
는 것은 아닌지 타진해 본다.
아울러 옷에는 방울과 약초를 넣은 꾸러미 등이 달려 있는데, 악마나 천사의 존재를 사실로 믿고 있던 시대에 이
러한 장치들을 달아놓았다는 것은 단지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원이나 예방 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 아이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던 조치였을 것이다.
책에는 이와 같은 그림과 이야기들이 총 8개의 장으로 나뉘어 소개되고 있다. 한 장은 다음과 같이 기획된다. 일
단 제목이나 화가도 적혀 있지 않은 그림을 첫 페이지에 소개한다. 그 뒤로는 그림에 대한 정보, 얽힌 이야기들
이 제시된다. 필요하다면 정보나 이야기와 관련된 다른 그림들도 소개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설명이 되고 나면,
본래의 그림을 다시 보여준다. 이번에는 그림 바깥의 여백에 그동안 설명했던 주요한 포인트들을 다시 적어주어
그림을 한층 자세히 읽게 한다. 그리고는 해당 그림, 혹은 그림의 주제, 피사체, 화가로 범위를 넓혀 한 차례 새
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뒤 한 장이 끝난다. 그야말로, 그림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배치해 놓은 구성이다.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하고는 몇 장이고 설명을 늘어놓아, 계속해서 그림이 나왔던 앞 장으로 돌아가 보며 읽어야 하는 평
이한 구성의 여타 그림책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큼직큼직한 도판과 명확하게 기획된 효율적 구성, 그리고 같은 주제에 오랜 기간 천착해 온 작가의 해박하면서
도 쉬운 설명. 그림에 관심이 있거나 관심을 가지려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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