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올린 '데일리'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 이런 책이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기획 단계
에서부터 전해 듣고 출간일을 기다렸었지만, 막상 나온 뒤에는 높은 정가 탓에 어디선가 우연히 만나게 되기를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도서관에서 우울한 근현대사 책을 읽다가 기분 전환을 할 겸 재미 삼아 검색을 해
보니 학교의 도서관에 떡하니 있었다.
부제인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에서 보이듯, 이 책은 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시대 순으로 소개하며
각각의 작품에 대해 감상과 평론을 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따로이 한 꼭지를 차지하는 작품의 수는
1968년 작 <황금철인>부터 1990년 작 <로보트 태권브이 90>까지 총 36개이며, 하나의 꼭지는 6에서 20페이
지 가량의 분량이다. 이전에 비하면 의미 있는 숫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90년 이후에도 극장용 만화영화는 몇
편 가량 제작되었는데, 그 작품들은 90년 이후의 상황을 개괄하는 하나의 특별 꼭지에 묶여서 소개된다.
작품 별로 다루어지는 분량에 차이가 있는데, 분량이 짧은 꼭지는 작품에 대한 필자 개인의 추억만이 주로 술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겠고, 분량이 긴 꼭지에는 해당 작품의 기획, 제작 등에 영향을 미친 당대의 시대 상황이나
해당 작품이 갖는 영화사적 의미 등에 대한 분석이 들어가 있다. 모든 작품마다 전문적인 분석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을테고, 책날개의 소개말에 따르면 작가의 집필관 자
체가 '이해하기 힘들고 장황한 전문가들의 평론보다는 대중적이고 읽기 쉬운 글로 접근하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니, 기왕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더 많은 정보를 구하려는 마니아나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역사를 공부
하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다소간 기대를 낮추고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방학 때면 오전 중에도 만화영화를 틀어
주는 것에 기뻐 날뛰던 80년대를 추억하고픈 나와 같은 독자들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투니버스
가 있잖아요, 같은 소리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발언과 다를 바가 없다. 케이블 TV가 등장
하기 전에는 평일엔 저녁 다섯 시부터 여섯 시 언저리까지만 만화를 틀어줬었다.)
하지만 오래 전 첫사랑과의 만남이 항상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옛 기억이 방울방울 떠오르는 영화 장면의 캡쳐
나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터의 손을 통해 재창조된 캐릭터들을 감상하는 기쁨과 별개로, 자료를 통해 접하게 되
는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역사란 표절의 역사라고 표현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대여섯살 소년의 눈
으로도 우리나라 로봇들은 대부분 마징가나 그랜다이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이 책
을 통해 접하게 되는 각종 기체, 캐릭터, 플롯 등에서의 유사성이란 너그러운 양해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
이다.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에서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과 유의미한 차이를 갖는 특징을 굳이 꼽아내라면 태권
도라는 소재, 그리고 반공이라는 주제의식 정도이다. 어떤 것도, 만화산업 자체의 발전이나 소비자인 어린이층
을 위한 시도였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표절의 역사에 대해, 저자는 감독 개개인(특히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청기 감독)의 예술가로서의
의식만을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 20시즌이 넘게 제작되고 있는 미 애니메이션 <The Simpsons>의 원화, 동화, 채색, 배경 등이 모두 한국에
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하청 팀은 애니메이션의 본산지 중 하나라고
해도 좋을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신뢰를 표현할 만큼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한다. (단, 전문성 외에도 경제성,
즉 인건비가 싼 것이 경쟁력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말인 즉슨, 자국산 애니메이션의 생산이라는 소
명이나 오리지널 컨텐츠의 창작이라는 어려움을 택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에게는 하청 작업이라는
단순하며 안정된 수익이 보장된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어려운 선택을 내렸던 이들의
'순수한 의지'까지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나 개인이 그 상황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면 충
분히 수긍이 가는 발언이지만, 공정하게 따져 보자면 해당 산업의 관련자들이 모두 그와 같은 의지를 갖고 시작
을 했을지, 또 얼만큼 그러한 의지가 지속됐을지 등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장은 논리적
인 반론이라기보다는 애정에 기본한 호소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좀 더 납득이 갔던 것은 구조적 측면에 관한 설명이었다. 애니메이션과 완구 산업은 비교적 초창기부터 상호 간
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온 바 있었다. 하지만 장난감을 만드는 완구사가 아예 스폰서가 되어서 자기들이 찍어
낼 캐릭터의 디자인에까지 직접 관여하고 나아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기까지 했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초반까지도 한 애니메이션이 성공하면 완구사 중 하나가 나서 그 캐릭터를 생산하는 수동적 양식에 머
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에도 <황금날개 123>의 완구 산업을 통해 애니메이션과 완구 산업 간의 연
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뽀빠이과학의 신현환 사장은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그 차이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국내
에도 일본과 같은 방식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애니메이션이 캐릭터 산업과 게임 산업에까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대규모 컨텐츠 사업으로 확장된 현재의 일본
에서 보듯, 이 방식은 우려되는 몇 가지의 부작용을 고려하더라도 분명 선순환적 발전을 꾀할 수 있는 모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도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완구사의 열악한 제조
기술에 있었다. 자체적인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던 당시의 한국 완구사들은 일본에서
로봇 프라델이 출시되면 이것을 사와서 그 부품에 맞추어 다시 금형을 제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캐릭터의 디자인은 소비자의 취향이나 창작자의 개성과 관련없이, 오로지 해당 시기 일본에서 어떤 완구
가 출시되었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 로봇이 일본 로봇을 닮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완구업계는 이로
부터 몇 년간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지만, 자체적인 투자개발 없이 모방과 표절에만 매달린 결과는 장기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전체의 쇠퇴로 돌아왔다.
읽고 난 마음이 개운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어쨌든 간에 7,80년대 유년기를 보냈던 이들의 삶에서 분명히 추
억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한국 로봇'을 함께 회상하고, 또 애니메이션 산업의 쇠퇴에 관한 원인과 영향을 적실
하게 밝혀 재발을 방비하는 큰 성과를 가졌다. 다만, 이렇게 독후감을 정리하는 시점에서도 헛되기 그지없는 가
정을 이리저리 해 보는 것은 역시 그것이 어린 시절의 크나큰 애정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절의 역
사를 딛고 발전해서, 지금은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일가를 이루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도 제 23기 데
일리는 크리스탈 타입이 좋을지 전효성 타입이 좋을지에 대해 인터넷 투표를 하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3 태권브이의 어깨 모델링은 박태환이라더라, 허벅지 모델링은 박지성이라더라, 같은 찌라시를 듣고 있었더
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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