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꼽사리다'의 진행자 중 한 명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의 신작. 이번엔 소설이다.
책의 판형이 조금 작고 두께가 적당히 두툼하여 '소설책'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3, 40년대 신문의 만평을 떠올
리게 하는 표지 삽화도 지나치게 세련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양장이나 금박, 아니면 거창한 문구
의 띠지가 있었다면 집어드는 마음이 좀 무거웠을 것 같다. 온라인 서평 몇 개를 살펴보니 표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실제로 손에 쥔 것은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대기업 총수도 아닌, 옛 재경
부 출신의 모피아(MOFIA)들이다. 그들은 거미줄같은 인맥과 거대한 국제 자본을 등에 업고 오직 자신의 이해 관
계를 따라 움직인다. 우석훈이 그간 각종 출판과 강연,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달해 온 내용이기도 하다. 알
면 좋다, 정도가 아니라 몰라서는 안 된다 수준의 이야기이므로, 새로운 매체를 통해 다시 한 번 전달되는 것이
한편으로 반갑다.
하지만 메시지가 아닌 매체, 즉 소설로서의 이 작품을 생각해 보면 몇 가지의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화자'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소설에 있어, 책 밖에서 실제로 자판을 두드리고 책의 인세를 받아 생활을
영위하는 '작가'와, 책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또 하나의 가상 인물인 '화자'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인
물이다. 소설을 감상하며 우리가 보다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화자' 쪽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화자는 3
인칭 관찰자였다가 전지적 작가 혹은 변사가 되기도 하고, 갑작스레 강사가 되기도 한다.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
을 위해 이야기 전략을 다변화한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시도된 것이라고 보기
에는 어려웠다. 한 예를 들자면, 애정이나 갈등이 깊어지는 '극적인' 신에서 갑작스레 '강사' 화자가 나타나 그
장면이 일어나게 된 경제학적 배경을 설명한다든지, 혹은 맥락과 큰 관계없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달한다든지 하
는 식이다. 반대의 경우도 왕왕 있다. 이야기를 듣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갈팡질팡하는 화자 탓에 스트레스가 발
생하는 셈인데,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길에는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냥 우석훈 형이 해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지 뭐'하고 화자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집중되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책장을 덮거
나. 어느 쪽이든 한 권의 소설로서는 치명적인 운명이다.
두번째로는 이야기의 유기성을 꼽을 수 있겠다. 작가 스스로 서문을 통해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본래 영화 시나
리오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이 없더라도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소설의 호흡이 영화의 그것이라는 분
명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 책에는 3부로 나뉘어 총 40개의 장이 있는데, 살펴보면 각 장이 하나의 씬(Scen
e)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활자보다는 영상을 선호하고 긴 호흡을 불편해 하는 요즘의 독
자를 위해 근래의 소설들이 많이 차용하고 있는 글쓰기 방법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른 장르의 방법론을 가져올
때 그것이 기계적인 적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고민이 없지는 않았겠
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이 결과로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였다면 조명, 음악, 배우의 연기 등 다
양한 요소들을 통해 씬과 씬 간의 간극이 채워지고 거기에서 맥락이 생겨났을 부분들이 이 책에는 공백으로 남
겨져 있는 경우가 꽤 있다.
세번째 아쉬운 점은 캐릭터이다. 이 소설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정의감을 가진 개인이 구조적 음모에 맞서 싸우
고 끝내 승리를 거두는, 곧 새 세계를 창조하는 전형적인 영웅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형적인 것은 나쁜 것
이 아니다. 그것이 '전형'이 된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온, 말하자면 '좋은 것'으로 인정받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과 완전히 똑같다면 굳이 새로운 작품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핵심은,
이미 익숙해져 버린 '전형'을 얼마나 '전형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개성적 캐릭터, 곧 전형
적 캐릭터의 변주는 그 주요한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거나, 혹
은 전형의 변주가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은 별다른 좌절이나 갈등을 겪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감으로 일관하는 인물이다. 여자 주인공이라
고 할 수 있는 인물은 한국인 여성으로 미 국방성과 건당 천만 달러의 뒷거래를 하는 브로커의 지위까지 올라갔
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중년의 나이에 만난 -강북의 연립 주택에 어린 딸과 살고 있는- 주인공과
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데, 살아온 삶의 이력과 잘 호응되지 않는 극적인 변화에 설득력
있는 묘사가 부족하다. 모든 음모의 중심에 있는 인물도 행동의 동기와 일관성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개
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음모를 실행하는 팀의 팀원들이 '법률녀', '경제녀'등의 호칭을 달고 있었다는
점이다. 각자의 전공 분야에 따른 호칭이라고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런 팀의 구성원끼리 '어이, 법률녀'하
고 부르는 게 사실적인 설득력을 갖는 장치라고 볼 수 있을까? 이해는 한다. 영화였다면 서로 다른 이미지의 배
우들을 배치하고 의상과 분장 등으로 일단은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소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고
민은 다른 소설가들도 모두 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결과로서 입체적인 캐릭터의 구축에 성공한 사례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 부분은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로서의 저자의 첫 행보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아쉬운 점들을 주루룩 늘어놓게 됐다. 하지만 다
시 한번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의 출판물로 이 책을 보자면 그 가치가 막대하다. 정치는 그 이면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알아내기가 어려운 것이지, 주어진 정보로 시시비비를 판단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
치를 판단하는 주요한 기준은 대개 덕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학습하고 체득하여 활용하며 살
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는 눈 앞에서 뻔히 일어나는 일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과
는 둘째치고 의도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들 중 일부라도, 소설이라는 말
랑말랑한 당의정을 통해 직접 피해자인 서민들이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경제학자들의 논
문 수천 편에 값하는 것일 테다. 저자도 이런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책 내에서 대통령 급은 실명
으로 언급되고 남덕우, 이헌재, 김진표 등의 인물들도 본래의 이름과 유사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소설의 주요
시공간은 2014년이지만, 언급되는 2012년 이전의 사건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며 소설 속에서 일어나고 있
는 일들도 현실 세계에 있었거나 있었을 법한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셈이다.
총평.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학습소설'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다. 학습만화는 만화이긴 하지만 학
습에 보다 방점이 찍힌 만화이다. 하지만 거기에선 때로 '만화 삼국지'나 '먼나라 이웃나라'와 같이 어떤 만화보
다도 걸출한 위용을 자랑하는 명작들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우석훈이 위대한 학습소설가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다행히 원작이 모피아, 교육 모피아, 토건족의 3부작으로 기획되었던 것이라 하니 다음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것
이 그리 먼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독서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태권, <히틀러의 성공시대 1> (1) | 2013.01.04 |
---|---|
나영석,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1) | 2013.01.04 |
강도현, <골목사장 분투기> (0) | 2012.12.22 |
김기협, <해방일기 1> (3) | 2012.11.29 |
지승호/이상호, <이상호 GO발뉴스> (2) | 2012.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