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김태권!'. <십자군 이야기>와 <한나라 이야기>로 이미 유명세를 얻은 바 있는 작가의 2012년 11월
작. 원작은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 중이며 1월 3일 현재에는 12월 14일에 올라온 47화가 게재되어 있다. 1권
에는 그 중 21화, 1930년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약진하는 내용까지가 실려 있다. 바야흐로 히틀러의 '성
공시대'가 시작되는 즈음이다.
작가의 책을 펼쳐들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독특한 그림체이다. 중세 유럽의 청동 판화로부터 그
대로 발전해 온 것만 같은 굵은 펜 윤곽선은 주로 일본 만화에 익숙해져 온 눈에는 몹시 낯설다. 이 낯선 느낌이
지나치면 불편함이 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김태권의 그림체는 딱 신선함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그
림을 보는 것 만으로도 따로이 새로운 재미가 생기는 셈이다. (이를테면, -역시 개인적인 생각인데- <H2>의 작
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재미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칸 구성에 있어서도 '망가'의 전형성과 그
래픽 노벨의 파격성 사이를 변주하는 솜씨가 독서의 재미에 한 몫을 더한다. 특히 이번 작품의 채색에서는 그간
취해오던 단색을 버리고 원색의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한 기법을 선보였는데 처음 그의 만화를 접하던 때의 낯
설음이 새삼 살아나 반갑다.
작가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한겨레의 일러스트 학교를 수료하였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고전
학 협동과정에서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남의 인생이고 한두 줄로 요약해 놓으니 별 특이한
점이 없는 것도 같은 이 약력을 내 것인양 찬찬히 살펴보면 무척 흥미롭다. 서울대 미학과의 학생들이 보기에는,
어쨌든 국내 최고의 정규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한 뒤 한겨레의 문화강좌를 들으러 가는 그가 이상했을 수
있다. 한겨레의 일러스트 강좌를 함께 들었던 학생들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으로 십자군에 관한 라틴어 원문
을 찾거나 한나라의 역사책인 <한서(漢書)>를 직접 번역하고 있는 그가 아마도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함께
연재를 하고 있던 편집자들은 자료라면 얼마든지 구해다 줄 수 있는데도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
는 그가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물을 놓고 보면 어떤가. 그는 그의 책들을 내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과
정을 묵묵히 걸어왔을 뿐이다. 옛 사람의 말대로, 걷다보면 그 걸어온 흔적을 뒤에 오는 사람들은 길이라고 부른
다. 삶과 맞닿은 공부. 무척이나 부럽고 또 언젠가는 꼭 실현하고 싶은 인생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해서 개척해 나가는 길이기에, 그의 책에는 항상 확실한 목적의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였던 <십자군 이야기>의 경우, 그가 작품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집필의뢰가 들어왔다거나 십자군을 전공해서 지식을 활용하고 싶다거나 했던 것이 아니라 부시의 이라
크 전쟁을 목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단순한 테러 사건과 그 복수전이 아니라 이윤의 충돌, 그리고 거대한 문
명의 충돌이었던 이 역사에 대해 그는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졌고 그 방식으로 천 년 전의 기록을
끌어오는 것을 택했다. 내용에 있어서 깊이 있는 질문들이 많지만, 이 시도는 시도만 놓고 보더라도 명징한 메시
지를 준다. '역사는 천 년이 지나도 발전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부시는 당나귀의 형상을 한 채 곳곳
에서 등장한다.)
<히틀러의 성공시대>에서도 이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발견된다. 서문에서 작가는 '마음에 안 드는 세력한테 히틀
러 같다는 딱지를 붙이는 지금 여기의 소동이 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발언을 통해, 이 책이
단지 히틀러와 2차 대전을 다룬 전문 전쟁서적은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지금 여기 파쇼 정권이 다시 나
타나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에 히틀러 문제에 관심을 처음 갖게 되었다는 동기와 달리, 이번에 그는 메시지의
완결을 독자에게로 돌린다. 나를 부당하게 매도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며 나는 과연 한 치의 부당함도 없었는가,
라는 자기 성찰의 중간적인 결과물로 보이는 이 시도에서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나 '괴물을 상대하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된다'는 철학의 의제들이 엿보인다. 한편으로는 겸손한 침잠으로, 한편으로는 웅대한 야망으로 읽힌다.
어느 쪽이든, 그가 훌륭한 붓을 지닌 사관(史官)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히틀러를 재구성하는데 역사에서 특히 어떤 사건을 취해 오는지, 그 사건을 재생하면서 히틀러
는 어떤 표정,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등에 있어 사관인 김태권의 주관적 판단이 안 들어갈 수는 없다. 전작
들의 독서를 통해 그의 가치관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나야 마음 편하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면 그만이
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분이라면 불편한 독서가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첨부하는 그림은 사실 히틀러에 대해
샴발라 설이나 지구 내부설, 남극 비밀기지 설 따위의 음모론에만 조금 자신이 있던 내게 히틀러의 진짜 생애에
대해 쉽게 설명해 준 이 책의 빛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인데, 이 정도의 도표 정리마저도 학습만화를 넘어선 정치
적 견해라고 보는 분에게는 굳이 권하지 않겠다. 그 외라면 강추. <십자군 이야기>와 <한나라 이야기>도 더불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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