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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나영석,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MBC의 <무한도전>과 함께 2000년대 후반의 예능을 양분한다고까지 불리웠던 KBS <1박 2일>의 감독 나영석

 

씨(이하 나영석)의 2012년 12월 신작. 부제는 '마흔을 준비하는 100일간의 휴가'.

 

 

 

 

2001년 KBS에 입사한 나영석은 2007년 같은 KBS 예능국의 이명한 PD가 안정적으로 런칭한 새 프로그램 <1박

 

2일>의 연출직을 넘겨받아 그  뒤로 5년간 동 프로그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프로그램이 장기화됨에 따라 분위

 

기의 전환을 위해 2012년 2월 시즌 1을 종영하고 새 출연진을 구성하여 시즌 2가 런칭되었는데, 이 때 연출인

 

나영석도 함께 하차하게 된다. 스탭도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간다는 <1박 2일>의 컨셉에 주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감독이었기에 그의 하차 배경을 두고 시청자 일반의 아쉬움과 함께 많은 추정들이 뒤따랐는데, 그 중 가

 

장 유력했던 것은 더 많은 기회와 보상이 약속된 케이블 TV로의 이적설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KBS 예능국은 차

 

장직을 약속하였지만, 나영석은 2012년 연말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인간의 조건>의 연출을 마지막으로 KBS

 

를 떠나 선배인 이명한 PD와 1박 2일을 함께 만든 이우정 작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CJ E&M에 합류하게 된

 

다.

 

 

 

 

이 책은 <1박 2일>의 시즌 1을 종영하고 주어진 휴가 기간 동안 그가 혼자서 다녀왔던 아이슬란드 여행을 씨줄

 

로 하고,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지난 5년간의 추억을 날줄로 하여 엮어낸 독특한 형식의 에세이이

 

다.

 

 

 

 

언젠가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연대기 형식으로 정리되지 않은, 단순한 에세이 형태의 자서전은 되도록

 

읽지 않는다. 밸런스가 맞지 않는 몇 개의 에피소드들을 낭창낭창하게 엮고,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라는 허구의

 

상을 반복적으로 강요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저 '말이 하

 

고 싶었을 뿐'인 그런 내용이라면 그 책의 저자가 <무릎팍 도사>나 <드림> 등의 토크쇼에 출연하기를 기다렸

 

다가 재미있게 시청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고 효율적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 책에 그다지 큰 흥미를 갖지 않고 있었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고충이나 연예인들의

 

진솔한 모습, 뭐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지 않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신이 다녀온 여행 이야기까지 섞여

 

들어갔다니 읽고 난 뒤 도무지 무슨 책을 읽었나 생각하게 될 것 같아 불안했다. 하나만 제대로 잘해도 재미있을

 

까 말까인데, 그냥 책을 쓰기로 한 시점에 자기가 하고싶은 말 몽땅 때려부은 것이라면 어떡하지, 하고. 

 

 

 

 

하지만 읽어본 결과는 큰 성공. 에세이 류의 독서에서는 오랜만에 무척 큰 재미 얻었다.

 

 

 

 

앞서 여행 이야기가 씨줄이고 <1박 2일> 이야기가 날줄이라고 표현을 하였던 이유는, 총 30여 개의 소챕터로

 

구성된 이 책이 실제로 여행 이야기 한 챕터 뒤에 <1박 2일> 이야기 한 두 편, 그리고 앞서의 여행 이야기에서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다음의 여이야기가 차례로 교차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뒤로

 

연결된 이 여행 이야기와 <1박 2일>이야기가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무릎을 칠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

 

으며 또 그 안에서 분량과 감정 분배의 밸런스가 잘 이루어져 있다. 정말로, 씨줄과 날줄이 잘 얽힌 하나의 작품

 

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재미와 감동을 잘 배합한 것이 최고의 성공 요인이었다고 하는 프로그램의 총연출이었

 

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까. 작가 본인은 겸손하게 <1박 2일> 이야기를 쓰다보면 머리가 아파져서 여행 이야

 

기를 쓰고, 그러다 보면 다시 또 즐거워져서 <1박 2일> 이야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술회하

 

고 있지만, 읽어본 감상을 말하자면 이것은 무척 잘 기획된 구성이며 또 소기의 의도를 성취했다고 느꼈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경험이 나열되는데도 연결되는 흐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것이 방송국 PD

 

와 북국 여행자의 두 이야기가 아니라 나영석이라는 사람의 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1박 2일> 이야

 

기를 하다보면 강호동의 진행 스타일이나 김C의 자진 하차 사건과 같이, 저자가 연예인들과 무람없이 접촉하던

 

인기 프로그램의 총연출이었다는 자극적 사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소재들이 언급되는 과정에

 

서 보다 방점이 찍혀있는 것은 그런 일들을 바라보는 인간 나영석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 이야기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1박 2일>의 뒷이야기가 굉장한 자극인 것처럼, 쓸쓸한 비수

 

기의 계절에 북국의 오로라를 찾아 홀로 떠나는 이야기 또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한 양념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 나영석'의 중력에 자연스레 눈이 끌리는 것을 막을 수 없

 

다. 결국 이것은 '충격 실화 1박 2일 뒷담화'나 '오로라를 보러 간 보헤미안'이 아니라 고민 많고 애환 많은 30대

 

후반 한 형의 이야기이다.

 

 

 

 

물론 방송의 한 인기인라고 해서, 서정적인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라고 해서 그 이야기가 무작정 재미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나영석이 갖는 특장점은 우선 이 모든 일의 경험자이자 전술자인 그 자신이 무척 매력적

 

인 인물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로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어 흥미로운 구성과 풍미가 있는 문체를 구사할 줄

 

아는 작가라는 것이다. 독서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 될 이 부분은 아무래도 직접 읽어보시고 느끼는 것이 좋겠다.

 

나는 특히 다소간 소심하면서도 끊임없이 재미와 흥미를 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생한 그 문체에 마음이 무척

 

끌렸다.

 

 

 

 

총평. 그러나 아무튼 에세이인지라, 기왕부터 <1박 2일>과 그가 좋았던 사람에게는 위에서 내가 말한 장점들이

 

확인되거나 말거나 구석구석 재미있는 내용일테고,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케이블 TV 이적에의

 

책 한 권짜리 면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강권할 수는 없으나, 어떤 생각을 하는 누구든 간에 몇 개의 문장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말해 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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