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2

오전 여덟시 이십사분

인천에서 등교할 요량으로 오랜만에 뜨뜻한 이불을 덮고 뒤척뒤척하고 있었다.


익숙함이란 때로 무섭다. 엄마가 밥을 짓는 소리에 깨면 다시 잠들 수가 없다. 마침 연극을 하는

도중 지갑을 잃어 버려 동사무소에 들러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어야 하기도 하고, 뭔가 이득을 본

느낌도 들어 일찌감치 일어나기로 했다.


신문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 정치얘기는 꽤 볼만했지만. 무협지를 읽는 듯한 기분이다.



덕분에 시간이 한참 남아 책장을 한바퀴 훅 둘러 보다가 어릴 적에 읽었던 책들을 몇 권 꺼내 보았

는데.

천사들의 합창 소설판도 있었고, -미친 듯이 읽었던- 톰 소여의 모험도 있었고. 그리고.




'달나라의 지도를 그리자'


원제는 토끼의 눈. 어쩌면 어른용으로는 토끼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런데 아마도 저것이 어른용의 책이었던 것도 같다. 기억하기에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에 헌책방에

서 샀던 것 같은데, 저렇게 활자가 작다니. 게다가 그 내용이라니.




나는 새 책에 대한 공포가 있다. 과연 재미있을까, 과연 내가 시간을 들인 만큼의 성과가 있을까.

헛된 일인줄은 알지만 이것은 취향이나 경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병이다. 의지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큰 감흥을 받았던 책들을 다시 읽고, 다시 읽고는 하는데, 어쩐지 이 책은 아주

감동하면서 읽었던 것이 기억나는데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십여년 전이라는 것 또한 뚜렷이

기억나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읽었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정말 우연인 것 처럼. 내용은 쓰레기 하치소 근처에 새로

부임한 여선생과 하치소 아이들간의 정이랄까, (한 줄로 요약해 놓으니 식상한 스토리같아 정말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그 곁가지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마 하치소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읽다가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랐는데, 어릴 때 나도 이런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고타니 선

생님이, 나와 동갑이었다. 스물두살. 아이구야. 책은 그대로이건만 사람은 이렇게 변했다니.



확실히 다른 시선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심리묘사에 관한 글들도

'공감'할 수 있었고(익숙했던 책에서 새로운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무엇보

다 고타니 선생님이 아니라 고타니를 만났다는 것이.  야아.



이야기는 --적이었다. (--에 무슨 단어가 들어갈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저 단어를 써

놓고 나는 한참동안 그 인위적이고 플라스틱 냄새 나는 듯한 어감에 지울까 말까를 고민해야 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목을 놓고 울어 버렸다.  아아.

간헐적인 눈물은 멈추지 않고 어제 저녁 이후로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배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

대어 나는 훌쩍대면서 사골국을 퍼 먹었다.


읽어 보시라. 행여 읽고 나서 뭐야, 애들용이었구나 하는 분은 어쩔 수 없다. 백의 하나라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울게 되는 사람이. 사느라고 바쁘고, 고민하느라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읽어

보시라. 이런 책을 읽는 것은 가히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 말할 만 하다.


수레는 다시 서투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다시 삶은 굴러간다.

'일기장 > 20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갖고 싶어  (0) 2002.10.17
민중은 분노한다!  (2) 2002.10.16
2001 ????, ????.  (3) 2002.10.13
잔인한 추억  (0) 2002.10.13
가장 근래의 사진입니다  (0) 200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