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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프레드 반렌트 / 라이언 던래비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 (다른. 2103,5.)

 

 

 

1.

 

제목과 표지의 메시지 그대로, '지상 최대의' 철학 사상을 만화의 형식으로 만나 보는 책이다. '콘서트'와 함께 인문학 도서 판매 전략의 단골 마담이기 때문에 제목에 '쑈'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표지의 좌측 상단, 마스크를 쓴 캐릭터의 왼쪽 위를 보면 '미국 도서관협회상' 이라는 박스가 달려 있다. 경계심을 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표지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면 적어도 만화화의 과정에서 유머나 재미가 핵심적인 전략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라 여겨져 한편의 다행이다.

본문은 300쪽이 약간 넘는 분량에 40개의 소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300쪽에 40개 소챕터면 하나의 소챕터 당 평 균 7쪽에서 8쪽 정도가 할애되는 것으로 계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평균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2, 3 쪽에 불과하거나 13, 14 쪽에 달하는 소챕터들이 적지 않다.

 

하나의 소챕터에는 대부분 한 명의 철학자가 할당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이나 '스토아학파'와 같이 한 번에 여러 명의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소챕터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총 50여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자들은 연대 순으로 등장하는데 연대는 다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법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은 대부분 서양인이다. 유, 불, 선의 대표로 호명된 듯한 공자, 달마, 노가 등장하긴 하지만 모두 중세 이전의 인물인 데다가 할당된 분량도 매우 짧은 편이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서양 최대의 철학 쑈' 쪽에 더 가깝다. 등장하는 서양 철학자들은 대개의 서양철학 개론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와 비슷하다.

 

 

 

 

 

 

 

 

 

 

2.

 

본문은 위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림칸의 규격은 대체로 엄격하게 지켜지는 편이다. 미국의 그래픽 노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림칸을 파괴하는 실험적 기교를 부리다가는 무척 많은 내용을 다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림칸 내에서도 각각의 역할은 기능적으로 분리된다. 예를 들어 등장하는 인물을 보자. 한 칸에는 대체로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많아봐야 두 명 정도가 등장한다. 두 번째 인물은 대체로 첫 번째 인물의 의견에 의문, 의혹을 제기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른바 '혹자' 캐릭터인 셈이다. 한 칸에 세 명 이상이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한데, 세 번째 인물부터는 두 번째 인물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거나 혹은 그저 배경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곧, 하나의 그림칸 내에서 A라는 의견과 not A라는 의견의 충돌 양상을 보여주는 경우는 있어도 전혀 다른 시각인 B나 C가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글의 경우에도 쉬운 이해를 돕는 장치들이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그림칸 안에 그대로 쓰여져 있거나 혹은 박스 처리되어 있는 글은 해당 철학자의 의견이나 사상을 정제한 '객관적' 지식이다. 일종의 나레이션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에 반해 말풍선 안에 들어가 있는 글은 그 의견이나 사상의 예시, 부연 설명, 혹은 그것을 듣고 제기되는 추가적인 의문과 같이 일종의 '리액션'인 경우가 많다. 나레이션을 보면서 이해를 하고, 리액션을 보면서 복습을 하는 셈이다. 이 콤비는 꽤 효과가 좋다.

 

  

 

 

 

3.

 

말하자면, 딱딱한 철학을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해 꽤나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책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은 해당 분야에 깊은 이해가 있지 않고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작업을 시도한 작가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안 작가인 프레드 렌트는 마블코믹스와 손을 잡고 여러 수퍼히어로들의 그래픽 노블 원안을 집필해 온 작가이다. 그가 집필한 원안 중에는 스파이더맨, 헐크, 아이언맨, 울버린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들도 다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고 놀라게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 원안을 쓰니 미국의 그래픽 노블이나 수퍼히어로 무비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지, 하고 감탄하게도 된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꼭 학계의 전공자여야만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내 인식의 수준이 낮은 것이었기에 이렇게 감탄한 것일까, 하는 반성도 든다.

  

아무튼, 철학을 공부하며 수퍼히어로 만화의 원안을 쓰고 공부한 철학으로 만화 책을 내는 작가와, 그 업적을 인정하고 '도서관협회상'을 수여하는 나라. 만만하게 씹는 게 미국이지만 이런 때에는 새삼 선진국의 면모를 보게 된다. (물론 표지에 '도서관협회상'으로 소개된 수상 내역의 실체는 사실 도서관협회에서 선정한 '십 대를 위한 최고의 래픽노블' 상이긴 하다.)

 

  

 

 

 

 

 

4.

 

위 그림은 <천재 유교수의 생활>의 만화가 야마시타 카즈미의 또 다른 걸작인 <불가사의한 소년>의 한 장면이다. 왼쪽의 작은 인물이 주인공인 '불가사의한 소년'이고, 오른쪽에 등장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이다.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하나, 인상에서 볼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추남이다.

둘, 그러나 동글동글한 표현에서 느껴지듯 그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이다.

셋, 앞으로 쭉 내민 손,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에서 보이듯 그는 순수하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넷, 말풍선을 통해 핵심적으로 전해지는 그의 메시지는 '순수'와 '대화'이다

 

와 같은,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으로 필요한 메시지들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다. 이것이 만화의 힘이다. 철학자와 관련해서는 한 편의 에피소드만을 다루었던 <불가사의한 소년>과 달리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철학의 내용이다. 알차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단점도 있다.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의 특징은 철학에의 소양이 없는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 중요한 것 중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작가는 왜 이 특징들만을 특히 표현해 냈을지 등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교양이 있거나, 혹은 없더라도 교양을 쌓고 다시 접해 보야아 할 것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캐릭터만을 다루려 했던 시도마저도 그럴진대, 한 권 전체를 통해 철학자들의 주장과 사상까지를, 그것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경우에는 더욱 많은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권 만으로 서양철학사에 대한 인상, 혹은 일반적인 교양 정도를 쌓으려 했던 초급자에게는 좌절감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산발적으로나마 있는 지식을 재확인하고 통합시키려 하는 중급자, 혹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상에 대해 어떠한 다른 해석과

표현이 있을 수 있는지가 궁금한 상급자라면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