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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부경복, <손석희가 말하는 법> (모멘텀. 2013, 8.)

 

 

 

 

 

 

 

도서관의 출입구 언저리에는 아주 큰 책상이 있다. 여기에는 반납된 후 원래의 자리에 꽂히기를 기다리는 책들

 

과, 학생들이 따로 대출을 하지 않고 도서관 안에서 읽은 뒤 이 탁자 위에 올려둔 책들이 있다. 대출과 반납이 활

 

발한 책들은 대부분 수업의 과제와 관련된 것이고, 도서관 안에서 많이 읽히는 책들은 만화책, 판타지 소설, 자

 

기계발 류의 것이 많다. 때문에 나는 대체로 이 탁자 위를 눈여겨 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는 편인데, 시간이 많

 

은 때나 혹은 무척 기대하고 찾으러 갔던 책이 서가에 꽂혀있지 않는 날에는 못내 서운한 마음에 잠깐이라도 뒤

 

적거려 보긴 한다.

 

 

 

위의 책도 거기에서 찾았다. '손석희처럼 생각하는 법'이나 '손석희가 성공하는 법'과 같은 제목이었다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눈길은 '말하는 법'에 꽂혔다.

 

 

 

나는 달변가가 못 된다. 설득이 되었든 선동이 되었든 도발이 되었든, 나는 말하는 도중 어떤 방향으로 상대방을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이 느껴지면 좀처럼 참지 못한다. 이건 일방향의 말하기, 그러니까 강의나 연설과 같은 말

 

하기에서는 나름의 메리트가 있지만 대화나 토론과 같은 쌍방향의 말하기에서는 기대한 결과를 얻기 어려운 성

 

정이다. 말하고, 듣고, 들은 바를 반영해 다시 말하고 하는 과정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본디 말하기를 좋아하는

 

천성 탓이기도 하고, 가정이나 의무교육 과정에서 위와 같은 말하기 방법을 학습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환경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릴 때도 그러하긴 하지만, 사회에 나온 뒤에 겪게 되는 꽤 많은 흥망성쇠는 말하기와 보다 깊은 관련

 

이 있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무릎을 쳤던 순간은 셀 수도 없다.

 

그래서, 애초에 교양으로 출발한 '말하기'에 대한 탐구는 해가 갈수록 생존의 필수행위가 됐다. 쟁점이 많은

 

국사회이니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생각할 거리, 그러니까 '말'은 차고 넘쳤다. 말하는 내용, 말하는 시기, 말

 

하는 자세 등, 하나의 말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재고 잘라보면 그 때마다의 맛이 있었다.

 

 

 

와중 손석희 씨가 진행하는 'MBC 100분 토론'은 공부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일상 생활 속에서 이만한 진심,

 

이만한 절박성, 이만한 욕망, 그리고 이만한 전략이 격돌하는 교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상대화, 가두

 

연설, 강연, 방송 등을 모두 포함해 내가 어떤 인물의 말하기에 진심으로 감탄하였던 순간들 중 반 이상은 이

 

로그램을 시청하면서였다. 용어의 적확한 사용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던 유시민 씨, 설득하는 전략의 요체

 

보여주었던 이철희 씨, 날카로운 논리와 높은 품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박경철 씨, 그리고 날카로운 비유와

 

넉넉한 유머의 달인 노회찬 씨 등이 특히 기억에 남다. 꼭 진보개혁 진영의 인사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박

 

형준 전 정무수석의 노회한 대화 전략, 전원책 자유경제원장의 압도적인 결기와 자아도취, 인명진 목사님의 여

 

유로운 자세 등도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하기가 연설이나 독백에 그치지 않고 토론으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손석희의 공이

 

었음을, 나는 그가 없어지고서야 알게 됐다. 2009년 그가 갑작스레 하차한 뒤 100분 토론은 진행자로 권재홍 아

 

나운서, 박광온 전 MBC 논설위원, 황헌 전 MBC 논설위원실 실장, 신동호 아나운서, 시사평론가 정관용 씨를 차

 

례대로 맞이하였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때로는 진행자로, 때로는 토론자로 보이지 않게 활약했던 손석

 

희의 힘을 점점 더 실감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제성이 있었던 주제의 회차, 뛰어난 패널이 출연한 회차, 혹은 최악의 패널이 출연한 회차 등을

 

다시 다운받아 이번에는 손석희에 주목하며 시간이 날 때에 돌려보았다. 과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의 몇 가

 

지 말하기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재미있는 발견으로 끝난 것도 있고 내 언어 습관에 가벼운 영

 

을 끼친 것도 있었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지만 말하기 공부를 100분 토론만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정

 

도로 그치고 있던 와중, 치밀한 분석의 결과를 정리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책날개의 소개에 따르면, 저자인 부경복 씨는 변호사로, '14년째 법학의 언어논리적 요소를 연구하고, 사람들 간

 

의 논리적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가 토론과 소

 

통의 미성숙임을 감안해 보면 무척 큰 일을 하고 계신 셈이다. 저서를 보니 한 권은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서,

 

한 권은 깊지 않은 수준의 삼성 고발서를 낸 모양인데, 이 책과 같이 본인의 전공을 살린 '말하기' 관련 책을 더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인 감상이고 또한 괜한 사족인 것 같아 괄호 안에 쓴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김앤장에서 '공정거래, 보건의료, 부패방지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하는데, 자세한

 

활동 상황도 모르면서 남을 함부로 비방하면 안 되지마는, 전 대통령님의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 이 회장님

 

의 '우리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발언 등을 보며 느꼈던 코믹한 위화감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총 3부 1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 '손석희의 말하기 능력'은 손석희에게 말을 잘 하는 능력이 있음

 

을, 그러니까 이 책과 같은 분석에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자리이다. 2부 '손석희가 논쟁하는 법'에서는 총 8장

 

에 걸쳐 손석희의 말하기의 전략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다. 3부 '손석희의 생각과 말하기'에서는 손석희의 말

 

하기가 지향하는 바, 곧 그의 언론관이나 가치관, 크게는 세계관과 같은, 보다 확장된 분야를 분석한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말하기는 그가 올해인 2013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한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서 가져

 

온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의 큰 특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면은, 범박한 소주제를 구획해 놓고 거기에

 

해당하는 발언들을 편린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손석희 식 말하기'가 아주 잘 드러나는 몇 개의 말하기만을

 

취하여 깊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사실 논문 형식의 글이 취하고 있는 구성으로 논문에 비해 비교적

 

호흡이 짧은 대중서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시도인데, 흥미를 잃게 하지 않는 수준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맞췄다.

 

(특히 책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2001년 브리짓드 바르도와의 '개고기 논쟁'은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명 에피소드이고,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

 

는 요소가 많은 말하기이다.)

 

 

 

 

책 자체가 두껍지 않고 또 잘 구획되어 있기 때문에, 인터넷 서점 등에서 목차와 책소개 정도만 간단히 둘러보아

 

도 책에 대한 첫인상은 쉽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소개 없이 바로 총평.

 

 

 

이 책의 내용은 말하기의 여러 형식 중에서도 인터뷰나 토론 등 특정한 분류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서도 '손석희 식 말하기'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꽉 막힌 아빠, 죽이고 싶은 직장 상사, 맨날 말싸움 나는

 

인과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손석희 식 말하기의 특성을 더 잘 부각시키기 위해 비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다른 이들의 말하기가 있

 

는데, 좋은 면을 공유하는 사례로는 오바마, 마틴루터킹, 노무현 등 평화-진보-개혁 세력의 인물들이 거론되는

 

한편, 대척되는 나쁜 면을 가진 사례로는 오세훈, 홍준표, 박근혜 등 보수 진영의 인사들이 등장한다. 이 '나쁜

 

면'의 다른 사례로는 앞서 말한 브리짓드 바르도나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의원 조다이 요시로 등

 

도 있다. 합치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불편한 독서가 될 수 있다.

 

 

 

그 외의 분이라면 대체로 만족스러울 것이라 생각한다. 분석의 과정이 실증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말하기에 특별

 

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득이나 토론의 과정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좋은 교보재를 얻은 기쁨이 있겠다. 아울러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에게도 분명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손석희는 '시사저널'이 1989년 창간 이후 매년 실시하고 있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2005년 이후로 9년 연속 1위를 하고 있다. 종편 채널인 JTBC로 옮긴 뒤에도,

 

그는 '시사인'의 올해 언론인 신뢰도 조사에서 17.3%의 지목률로 1.7%를 차지한 KBS의 민경욱 앵커를 10배 차

 

이로 앞서며 조사가 시작된 이후 5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이 정도가 되면 손석희 개인의 매력 정도가 아니

 

라 한국인이 일정하게 지향하는 덕목이 각인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체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이 책,

 

귀중하다. 나온지 넉 달도 안 됐는데 몇몇 인터넷 서점에서는 벌써 30% 할인 중인 것도 매력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