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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폴 발렌트, <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맛깔나는 제목과 눈길끄는 표지에 언젠가 볼까말까 목록에 올려두었던 책. '착한 사람을 괴물로 뒤바꾸고, 평범

한 일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 심리의 비밀'이란 부제를 보고 조금 잘 포장한 심리학 대중서라는 예상을 하

고 있었기 때문에 볼까말까 고민을 했던 것이다. 심리학 대중서 카테고리에서는 주로 미국인, 혹은 영미권의 서

양인을 대상으로 하여 정립된 이론을 도식적으로 한국인에 대입시킨 것이나 '야심만만'이나 '화성남자 금성여

자' 류의 뻔한 남자여자 이야기, 혹은 자기계발서 등 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리 선호하는 분야는 아닌데, 마침

얼마 전 살인자들의 내면심리를 독특하게 묘사한 <살인자ㅇ난감>이라는 만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집어들게

됐다. 결과는 영 딴판. 표지를 잘 살펴보니 원제는 'In Two Minds'. 그러면 그렇지.

 

 

저자인 폴 발렌트는 정신과 전문의이자 트라우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한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정권 하의 몇 안 되는 생존자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본인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정신과 마음의

상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트라우마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행하였다. 이 책은 그러한 연구의 바탕이 되

었을 실제 상담 과정 중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예닐곱 개의 사례가 실려 있다. 책의 뒷날개에

실린 사례 요약을 인용한다.

 

 

1. 새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숨기고 살아온 남자. 30년 후 존경받는 사업가가 되었지만 어

느날 동료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협받자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2. 자신 때문에 가족의 전재산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괴로움에 휩싸인 소녀. 더이상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크나큰 상실감과 사고의 극한 스트레스가 그녀의 온몸을 마비시켰다.

 

3.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면서도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길,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던 어린 아이.

수십 년 후, 변호사로 성공저긴 삶을 살고 있지만 지워버린 줄만 알았던 당시 기억은 매일 밤 그녀를 괴롭히는

데...

 

4. 거대한 산을 송두리째 불태운 대화재 속에서 살아남았으나 자신만 무사하다는 죄책감과 자신을 외면한 사람

들에 대한 분노로 힘겨워하는 재난 생존자들. 무엇이 이들에게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갔는가?

 

 

책의 뒷날개에 실리지 않은 케이스 가운데 눈이 가는 것은 저자 자신의 트라우마에 관한 내용이다. 4-7세 시기

에 나치를 피해 숨고 도망다녔던 저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60을 넘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쳐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옛날의 그 장소들을 찾아 다니며 처참한 기억들을 다시 되살려 맞서

고, 사회적으로는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 모임을 설립해 처지가 같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한편으로 자신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은 상담 중 오고갔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자신이 '트라우마'라는 특정 분야의 권위

자이고 이 책에 실린 사례의 상담자들이 모두 트라우마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심리학적 현상이나 논문과 같은 분석을 기대한 이라면 다소간 실망할 수도 있다. 단, 상담을 녹취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상담자 개개인의 개성이 잘 반영된 대화 형태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핍진한 상황 묘사는, 가벼

운 독서를 원했던 이들에게라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흡사한 내용을 명배우들이 연기했던 미드 <In Treatment>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책으로는 상상

만 해야하는 상담자들의 반응을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상담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일견 평

범해 보이는 발언이나 기억들이 사실은 어떤 식으로 무의식을 반영하는지에 대해, 긴 시간이 드는 미드 시청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라 할 것이다. 영유아기의 경험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크고 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새삼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은 과외의 소득이다. 그럭저럭 괜찮

았다. 추천까지는 아니지만 읽는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전 독후감인 <내 손 사용법> 편을 길게 쓰고 나니 곧

해가 뜰 판이라 이 글은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