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핵심적일 정보부터 먼저. 2007년에 발간된 이 책은 2014년 3월 현재 절판됐다. 인터넷 서점 가운
데에는 더러 재고가 있는 곳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노란 바탕과 선명한 검은 글씨의 표지가 눈길을 이끈다. 제목의 타이포그래피 또한 요리조리 살펴보게 하는 맛
이 있다. '왕'을 내려서 배치한 것도 재미있고, '한'에서 'ㅎ'을 처리하는 방식도 낯설고 신기하다. 단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야생호랑이의 거친 일생을 다룬 책의 내용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책의 서두에는 손꼽히는 '자이니치' 지식인 중 한 명인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의 발문이 있다. 서경식은
여기에서 작가의 소개와 이 책의 창작 배경, 그리고 본인의 독서 경험 등을 아울러 소개한다. 생생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 그리고 잘 배치된 정보 등이 어우러져 있어 그 자체로 감상의 재미가 있는 글이다.
서경식에 따르면, 작가인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 바이코프는 1872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
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여 군인이 되었고 서른 살 무렵부터 만주 지역에서 복무하게 된다. 주요 업무는 만주
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철도를 수비하는 것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만
주의 동식물을 관찰하여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게 된다. <위대한 왕>의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때의 관찰과 체험이 큰 동력원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줄거리는 크게 어렵지 않다. 유라시아 북부의 침엽수림 지역인 타이가에서 한 마리의 한국호랑이 암컷이 남매
새끼 두 마리를 낳는다. 새끼를 배게 하고 떠난 아버지는 이 지역 호랑이 무리를 호령하는 '왕'이다. 소설의 주
인공은 남매 가운데 먼저 태어난 수컷 호랑이이다. 아버지와 함께 자라지는 않았지만 왕의 혈통을 물려받은
주인공은 이내 무섭게 성장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새로운 왕이 된다. 타이가의 동물들은 물론 지역의 토
착민들도 주인공을 신격화하여 신봉하게 된다.
평화롭던 왕의 일상에 경적을 울린 것은 타이가 삼림을 잠식해 들어오는 개발의 물결이었다. 평화로운 거리감을
유지하던 호랑이와 인간의 행동 반경이 겹치게 된 것이다. 새로 지어진 마을에서 가축의 피해가 이어지는 한편
왕을 포획하려는 군인 등을 중심으로 심각한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이름난 호랑이 사냥꾼
을 불러왔다. 사냥꾼들은 왕의 부인과 새끼 두 마리를 생포하였지만 이를 보고 광분한 왕의 습격에 사망자를 내
게 된다. 그러나 왕도 기습을 하는 도중 사냥꾼의 총에 맞고 말았다. 왕은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죽음을 맞는다.
간단하게 요약해 놓으면 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사실 근래에야 이 책을 알게 됐는데, 웹 상의 독후감
들을 보면 어릴 적 전집류에서 접한 바 있다는 회고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서경식의 발문에 따르면 완역
판은 2007년에 출간된 이 책이 처음이고, 이전에 출간된 것은 모두 아동용 축약판이라 한다. 말인즉슨, 아이들
에게 읽혀도 좋을 정도로 명쾌하고 단선적인 전개라는 것일 테다.
그러나 호랑이를 비롯한 만주 지역 동물들의 습성에 관한 자세한 묘사에서는 저자의 인문학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깊숙한 타이가 삼림까지 덮쳐 온 개발의 흐름을 기록한 것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제국주의적 현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던 것으
로 보이지만 - 서경식의 해석과 같이 근대 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대자연이라는 구도에서 '구미열강의 침략 앞
에 내던져진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암유로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깊은 독후감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탄탄한 조사와 사실적인 묘사를 지켜보는 소설적 재미이다. 좀 다른 시
각의 동양 버전 시튼 동물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나는 개인적인 재미를 하나 더하였는데, 마치 다큐멘터
리의 한 장면처럼 충분한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동물을 묘사하다가 갑작스레 동물의 속마음을 따옴표 안에 넣어
소개한다든지, 충분히 정리되지 못한 장면을 작가의 나레이션으로 처리하고 휙 넘어간다든지 하는 부분에서는
옛 소설의 투박함이 느껴져 무척 즐거웠다. 유년 시절 토요일 방과 후나 무료한 여름방학 중의 어느날에 문득 집
어든 옛날 책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하곤 하던 기억이 겹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이런 느낌을 원하는 독
자를 만난다면 자신있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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