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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11.)

 

 

 

 

 

 

열 살 무렵까지 살았던 동네에는 기묘한 건물이 있었다. 교도소도 아닌데 철책은 높았고 드나드는 차는 하나같

 

이 80년대의 인천에는 흔치 않았던 중형 세단들이었다. 유년기의 관찰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는 각그랜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공교육 과정에 영어 과목도 없었고 동네에 학원이라고는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 정도 뿐이었던 시

 

절이라 우리의 방과후는 자기 전까지 대개 동탐험과 저녁 식사, 그리고 제 2차 동네 탐험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와중에 문방구에서 혀가 새빨개지도록 불량 식품을 사먹어도, 뒷산 절간에 바쳐진 사

 

탕을 훔쳐먹어도, 심지어는 네의 무고한 창문을 깨먹어도 꿀밤 몇 대로 끝나곤 했지마는, 앞서 말한 '기묘한

 

건물' 근처에서는 서성거리기만 해도 모르는 어른에게조차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 건물이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전기획부의 인천 지부였던 것을 알게 된 것은 20여 년 후의 일이다.

 

 

 

국가정보원의 시초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쿠데타의 참모 격인 김종필

 

에 의해 고안된 중앙정보부이다. 중정은 이후 1980년 12월, 12.12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안전기획부로 개편된다. 김삼의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 안기부는 그간 둥지를 틀고 있던 '남산'을 떠나 현

 

재의 위치인 내곡동의 신청사로 이사를 하였다. 김영삼을 이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은 1999년, '중

 

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라는 명칭이 국민 일반에게 주던 부정적인 느낌을 없애고자 '국가정보원'이라는 새 이

 

름을 붙였다.

 

 

 

지나간 근현대사에서 뿐 아니라, 2014년 현재에도 국가정보원은 정치 카테고리에서 가장 많은 기사를 쏟아내고

 

는 주체 중 하나이다. 2011년 서울시청에 재직 중인 화교 출신 새터민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증거

 

를 조작했던 사건,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인터넷 게시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건, 2013

 

남재준 원장이 정국의 전환을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대화록을 폭로한 사건 등이 현재 수사 중이거나

 

재판 중이다. 이러한 한때. 벼르고 별러 왔으나 부록을 합하여 88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부담스러워 미뤄 오던

 

이 책의 독서를 감행했다.

 

 

 

앞서 국정원의 연원 요약에서 밝혔듯, 정보기관이 '남산'에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때이다. 책의

 

저자 김충식은 그 가운데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중앙정보부 시절에 남산에서 있

 

었던 일들을 기록했다. 책의 표지에 사격 연습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책이 기획되고 출간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노태우 정권 때인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러나 생생한

 

현장감을 그대로 담아낸 취재 자료들은 값진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어 그 이후로도 근현대사를 다루는 서적과

 

프로그램 등에서 활발하게 인용되어 왔다. 그리고 18대 대통령 선거를 3주 가량 앞둔 2012년 11월 말에 개정

 

증보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오늘 독후감을 쓰고 있는 책은 바로 이 개정증보판이다.

 

 

 

책의 본문은 총 2부 20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61년 5월 김종필이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의 방에서 새로운

 

정보기관의 체제를 짜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72년 유신의 선포와 그 직후의 분위기까지를 다룬다.

 

2부는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서 시작해 80년 12월 유학성 대장이 예편과 동시에 초대 안

 

기부장에 취임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한 장은 보통 15쪽에서 45쪽 정도의 분량을 갖는데, 장을 나누는 기준은 대체로 부장의 취-퇴임이거나 정계

 

주요한 사건 전후이다. 여기에 중정과 관련된 '10대 사건',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간단한 약력을 정리해

 

놓은 '정치 파워엘리트 인맥사전' 등의 내용이 실린 부록이 덧붙여져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시기를 다루는 근현대사 도서는 시중에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당시 체제 안정에 주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중앙정보부이므로, 그러한 도서들에서 중정의 활약상을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당연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특장점은 그 모든 일들을 '중정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근현대사

 

를 압축해 놓은 한두 권 분량의 도서에서는 아무래도 집권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저항 세력의 대표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이 가장 상징적인 인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내용의 흐름이 짜여질 수

 

밖에 없다. 대체의 맥락을 이해하거나 해당 도서의 저자가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

 

이 없지만, 현실의 인과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누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러한 '껍질'을 들춰 내고 그 밑에서 정략과 음모 등을 통해 가장 활발히 암약했던 세력인 중정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준다.

 

 

 

이 '보여주기'는 관련 인물들의 직접 증언, 회고록 등을 통한 간접 증언, 그리고 유출되거나 공개된 각종 문서들

 

을 인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특히 사건의 발생 일시나 경과 등과 같은 건조한 자료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언 인용과 현장 묘사 등을 통해 마치 현장에서 함께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20여 년 전 이전에 출간되었음에도 꾸준히 인용되고 마침내 증보 개정판까지 나오게 된 것

 

은 그래서일 것이다.

 

 

 

한편 단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의 초판이 출간된 것은 92년의 일로, 당시 이러한 사회과학 서적을 접할 수 있

 

는 연령의 독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중정이 뒤에서 이러이러한 계략을 꾸며서 마침내 그 사건이 터졌다'까지만 말해주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터진 그 사건의 자세한 경과나 이후에 정계와 사회에 끼친 영향 등까지 일일이 다 설명하고 비평해줄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당시의 독자들도 다 아는 얘기였을테니 말이다. 당연히, 당시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공부하지 않은

 

오늘날독자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경험을 못 했든 공부를 안 했든 아무튼 그 시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독서가 어려워지는 지점 하나 더. 저자

 

는 한 장에서 인물이나 단체를 다룰 때 종종 그 장이 다루고 있는 시기 이후까지의 행적을 함께 소개하곤 한다.

 

이를테면 73년 윤필용 사건을 소개하면서 하나회를 언급한 뒤, 그 하나회가 70년대에 어떻게 성장했으며 80년

 

대에 어떻게 집권했고 90년대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정리해 주는 식이다. 몰랐던 하나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은 고맙지만, 이렇게 한참 몰입하며 읽다가 어느새 다시 73년과 74년으로 돌아가버린 내용을 접하

 

면 조금 혼란스럽다. 나는 현대사 강의를 위해 정리해 두었던 연표를 꺼내어 옆에 두고 같이 읽었다. 지금은 이

 

때 얘기하는 중이지, 지금은 한 해 넘어가서 이 때 얘기하는 중이지, 하고 손으로 짚어가며. 이왕의 개정증보판

 

인데 챕터의 첫머리마다 간단한 연표라도 넣어 줬더라면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하기사 단점이라지만 그 또한 다른 책들로 공부를 쌓고 나면 불편하지 않을 터. 다만 선뜻 권하기 어려운 것은

 

앞서 고백한 것처럼 소도 때려잡을 만한 880여 쪽의 분량 때문이다. 즐겨 근현대사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에게

 

는 오히려 즐거움이겠지만 시험 삼아 도전해 보려는 이에게는 이래서 학교 다닐 때 국사 공부가 하기 싫었었지,

 

하는 새삼의 깨달음을 줄 수도 있겠다. 긴 분량이지만 결국 요약하면 '중정은 나빴다'이고, 핵심은 '어떻게 나빴

 

나'와 '얼마나 나빴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떻게'와 '얼마나'는, 독서와 팟캐스트 청취 등을 통해 당대

 

의 물정을 어느 정도 아는 이에게조차 충격적인 수준일 것이다. 이 땅에 있었던 일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되

 

는 이 거리감, 이 거리감에 바로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