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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재훈, <라이벌> (아트북스. 2012, 9.)

 

 

 

 

전작인 <디자인 캐리커처> 1, 2권에서 캐리커처의 형식을 통해 20세기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풍성하게 소개하

 

였던 김재훈의 후속작. 전작을 재미있게 읽고 구입까지 했는데 어째서 같은 작가의 후속작을 찾아볼 생각을 하

 

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출간된 지 1년하고도 반이 지난 때에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독특한 캐리커쳐와 짧은 나레이션으로 대상을 소개하는 형식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소재의 영역을 확장

 

하였다. 총 다섯 개의 챕터 중 '그래픽디자인 & 비주얼 아트', '패션 & 프로덕트 디자인'은 전작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문화 아이콘', '대중매체', '클래식 음악'은 인물, 매체, 예술과 같은 다양한 장르를 포섭한 결과이다. 거

 

기에, 해당하는 인물이나 사물의 '라이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선정하여 특성을 비교해 가며 보여

 

주는 구성을 덧붙였다. 예를 들면 위에 게시한 책 표지의 그림처럼 '수퍼맨 대 배트맨'이라든지, 본문의 첫 장을

 

장식하는 '오드리 헵번 대 메릴린 먼로' 등이다. 책에는 이렇게 총 67쌍의 라이벌이 소개되고 있다.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인 만큼 마침 출판사에서 올려준 본문 이미지가 있으니 한 차례 직접 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한 꼭지는 위의 구성처럼 예외 없이 네 쪽으로 구성된다. 한 장에 두 쪽씩 두 번. 1쪽과 2쪽에는 소개되는 대상

 

의 캐리커처가 큼지막하게 게시된다. 나레이션과 캐리커처에 딸린 말풍선 안에는 범박한 소개 내용이 있기도 하

 

고 작가 자신의 짤막한 평이 들어 있기도 하다. 3쪽과 4쪽에는 크기가 작은 두세 장의 그림이 들어가 있다. 여

 

기에는 소개 대상에 대한 확장된 정보들이 실린다. 역사적 인물의 경우에는 영향을 주고받은 주변 사람이라든

 

지, 디자이너의 경우에는 앞 쪽에 소개된 사례 외의 다른 디자인이라든지 하는 식이다.

 

 

 

내용에서 주어지는 정보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은 해당 분야에 관심과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혹은 전

 

공자에게는 큰 재미를 주기 어려울 듯 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거나 아니면 너무 뻔하거나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편

 

안한 실용서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 디자인 등의 전문 분야를 접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입문서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김재훈의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역시 다종다양한 캐리커처를 만나는 시각적 쾌감이

 

라 할 것이다. 위의 그림은 '오드리 헵번 대 메릴린 먼로' 편의 3, 4쪽이다. 나는 특히 공들여 그려낸 1, 2 쪽의

 

큼직한 주인공 캐리커처보다 3, 4쪽에 등장하는 작은 조연 캐리커처 쪽에 흥미가 갔다. 몇 개의 선 만으로 인

 

물이나 사물의 특징적 면모를 탁 잡아채는 그 솜씨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나는 윗 그림에 등장하는 세 명의

 

조연 가운데 극작가인 아서 밀러만 그 실제 얼굴을 알고 있는데, 처음 캐리커처를 보는 순간부터 그 표현력에

 

감탄하고 웃음이 났다. 그러다 보니 다른 두 사람은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도 싶고, 찾다가

 

귀찮으면 인물을 형상화하는 기법을 관찰하기도 하고, 아무튼 과외의 재미가 쏠쏠하다. 기왕에 아는 바도 없고

 

유명 교향곡이나 지휘자 등에 대해 딱히 더 알고 싶지도 않은 '클래식 음악' 같은 챕터에서도 마지막까지 즐겁

 

게 독서한 것은 역시 '그림'의 힘일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문화만담꾼 김재훈의 캐리커처 문화사'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많지 않은 시간을 이용해

 

한 권의 문화사 도서를 깊이 탐독하는 이에게는 굳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인터넷 서점의 독후감에서도

 

'재미에 비해 깊이가 없다', '문화사라면서 다루는 장르가 협소하다' 등의 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탓이다. '그

 

림' 자체의 힘을 느끼고 싶은 독자, 필자, 편집자에게라면 전작과 마찬가지로 필독의 경지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중고 서점에서 세 권쯤 발견하게 되면 세 권을 다 살, 끝내 중고서점에서 찾을 수 없다면 신간으로라도 사고야

 

말,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