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표지 그림은 벗겨내는 표지에 그려진 것일까?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앞표지에는 글자 하나 없이 그림
만이 있다. 깜깜한 벽을 배경으로 하여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을 남녀 주인공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
는 그림인데, 그 대담함과 색채의 아름다움에 반해 책장을 넘겨보게 됐다.
이 만화책의 작가는 캐나다인이다. 서양의 만화책을 읽을 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단절'의 느낌일 것이다. 개
별 컷에 들어간 수고는 흔하게 접하게 되는 일본 만화의 일반적인 컷에 비해 엄청난 수준의 것이고, 대사의 정
보량과 깊이 또한 현격하다. 하지만 덕분에 '만화책이라면 역시 휘릭휘릭 읽어나가는 재미'에 습관화된 처지로
서는 컷마다 멈춰 서서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이 단절감이 불편하다. 파격적인 구도나 아름다운 컷
이 다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서는 서양의 만화책을 좀처럼 사지 않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만화책은 컷의 세밀한 구성과 같은 서양 만화의 장점, 그리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일본 만화의 장점을
적절히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서양 만화 특유의 사변적인 대사의 흔적은 전편에 걸쳐 드러나지만, 과감하게 단순화된 인물 처리나 비교적 정
형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컷 구성 등에서는 일본 만화의 영향이 보인다.
스토리는 길지 않다.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자신을 관찰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가 의외의 성공을 거두어 감독은 예전에 호
텔로 쓰였던 적이 있는 교외의 옛 건물을 구입한다. 감독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친구 커플을 이 곳으로 초대한다.
건물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호텔로 쓰인 적이 있었던 만큼 각종 무대장치나 공연설비 등으로 가득한
이 곳은 네 명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들은 방종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사랑과 인생에 관한 솔직
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직접 배우가 되어 즉흥극을 상연해 보기도 하며, 옷을 비롯한 인간적 양식을 모두 벗
어던지고 숲과 호수를 날뛰며 누비고 다니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친구 커플은 도시로 돌아가고, 감독은 여자친
구에게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곳에 혼자 머무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유기적인 플롯을 기대하는 분에게라면 불쾌한 독서가 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상당 부분 작가의 개인적 경험
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서 오고가는 인생, 자아, 관계, 섹스 등에 관한 사유 또한 다소 주관적인 것이
라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채로 넘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몹시 즐겁게 독서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림의 힘' 덕분일 것이다. 위의 그림은 출판사에
서 제공하는 몇 장의 책소개 가운데 그나마 나은 것을 골라온 것인데, 이 책에는 펜과 색연필, 그리고 마커의 위
대함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 훨씬 멋진 기법들이 가득하다. 비오는 밤의 도시, 석양이 지는 바다, 암흑 같은 옛
건물 등의 '장면'이 매력적으로 그려진 부분도 적지 않고, 또 극단적으로 아이콘화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에
도 '즐거움', '두려움', '흥분', '광기'등의 '정서'가 날것처럼 선연하게 나타난 그림들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대뜸 재미있다고는 하기 어렵다. 하지만 개별 작품이 아니라 '이야기', '그림', '만화' 등의 주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거나 고민해 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아주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분량은 평범한 소
설책 한 권의 한 배 반 정도의 두께이고, 가격은 다소 비싼 듯한 16,800원이다. 성인용으로 구분된 것도 아니
고 인물들이 단순하게 표현된 터라 엄청 에로틱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노출과 섹스 신이 다수 등장하니 이 점도
감안하시면 좋겠다. 나는 만약 중고서점에서 만난다면 두 권 구입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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