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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2002. 10. 22. ȭ

많이 공부해야 했었는데 하고 후회했던 '청년기의 갈등과 자기이해' 시험은 10여분만에 다 풀고도

스스로 만족할 만큼 쉬운 문제가 나왔다. 지식을 묻는 문제가 아니라 지혜를 묻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식하고 지혜롭다는 말은 아니다.)



학교에는 단풍이 들고 있다. 수동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취미인 형 덕분에, 학교에 멋진

풍광이 들 때마다 마치 하나의 그림같은 작품들의 모델이 되곤 하는데, 이번 가을 사진은 계획 없이

갑자기 몇 장 찍은 것인데도 잘 나와주었다. (스캔을 기다리는 중이니 기대하시라.)


학교 앞 독수리 빌딩 맞은 편에 있는 사진관에 사진을 맡기면, 일회용 자동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매

끈매끈하니 보기 좋게 나오지만, 형의 작품은 따로 소중히 보관해도 좋을 만큼 그 질이 다르다.



작년 봄 봄비를 맞으며 찍었던 사진부터 해서 계절별, 시간별로 주욱 넣어 둔 봉투를 꺼내어 넣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모두 꺼내 다시 쳐다 보았다.



4월, 학교에는 정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지나가다 보면 (눈에 띄는 편인지)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도 심심치 않게 받게 된다. 올 해에는 한참 좋았을 때의 전 사람과 꽤 시간과 공을 들여 사진을

찍었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 포스터처럼 너무 잘 나와 줘서, 여기에도 올려볼까 생각했었지만 어쩐

지 실례를 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래도 이전 사람과의 그런 사물을 통한 기억들은, 작년의 사람처럼 추억으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는데, 다시 떠올릴 때마다 잊혀질 즈음의 일들이 문득 파-앗  하고 떠올라 재미있기도 하고 가슴

시리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고정된 듯한 느낌이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다 기억하고 있고, 그럴 수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 연결고리들마저 사라지거

나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인천집으로 내려오는 시외고속버스의 맨 뒷칸에 앉아 시간별로 하나하

나씩 떠올리며 정리를 해 보았다. 조각조각별로 모아서,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 잘 쌓아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든 가족들의 잠귀를 걱정하며 슬금슬금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잠시 앉았는데, 놀리

기라도 하듯이 그 사람과 함께 해 두었던 반지가 얌전하니 놓여져 있었다. 마법에 걸린 듯한 느낌.

아랫배가 아픈 느낌이 아니라, 분명히 항상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기억은 나지만 왜 내가 그 사실

을 이리도 무덤덤히 지나치고 있었을까, 하고 버-엉해지는 느낌.



올해 가을은 짧을 듯 하다. 걱정이다. 호빵만으로는 가슴의 추위까지 달래기가 쉽지가 않다.


아참. 내일 수요일은 우리 귀여운 02학번들의 격전시험날.  기흥이 빛나 환철이 경아 보미 보연이 신

각이 원준이 지희, 이외에 들렀지만 글을 남긴 적이 없어 내가 생각하지 못 하는 내 사랑하는 동생

들, (적어도 영작문만이라도) 시험들 잘 보라구. 난 벌써 하나 잘 봤어. 흐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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