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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등교

이사를 간 집에서 첫 등교를 했습니다. 새 집에는, 신촌 쪽에서 간 경우만 있지 와 본 일은 없어

서 생각보다는 시간이 약간 더 걸렸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타 보는 아침버스의 느낌이 과히 나쁘지

않아 즐거운 마음으로 등교할 수 있었습니다. 재수를 할 때에, 이사를 갈 때마다 새 장소에서의 첫 날

에 느껴지는 약간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듣던 음악인 쿨 6집을 오랜만에 꺼내어 들어본 것도

괜찮은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예전 생각도 나고. 다행히 날씨도 따뜻했고. 이러다간 세균들이 안

죽어서 내년 농사가 좋지 않을텐데, 라고 농군의 아들다운 생각도 잠시 해보고.


새집은, 인천 석바위시장같은 재래시장 틈에 있습니다. 덕분에 시끌시끌, 아주 사람사는 느낌 드는

곳입니다. 사진 찍을 것도 많을 것 같고. 원하시는 분은 마음껏 초대할 요량입니다.



서울에서는, 서울 모드로 살게 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 물가도 인천과는 많이 달라 돈을 쓸

때마다 일일이 신경쓰다가는 제풀에 지치는 면도 있고, 무엇보다 노는 것만 풀파워로 해도 고갈되

지 않는 곳이라, 여하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모습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전에 살던 집은 그런 서울모드가 극대화 되어 있는 신촌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잠시 누워

쉬다가도 전화 한 통 받으면 1분도 안 되어 다시금  그 소용돌이에 풍덩 빠져들 수 있는 곳. 그래서

그런 삶이 아예 몸에 배어 있었나 봅니다.



이사 첫 날이었던 토요일, 같이 사는 정훈이 형은 밥솥과 숟가락등을 가지러 가까운 친척네 집에

가셨습니다. 덕분에 이전 방의 두배가량 되는 큰 방에서 혼자 밤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TV나 인터

넷도 연결이 되어있지 않았고 전화기도 요새 영 먹통이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

습니다. '소용돌이 안'에 언제나 있었던 신촌에서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라, 적응하느라고 한참을

허둥거렸습니다. 이내 곧 눈 쭉 찢고 어디에도 지지 않을 거라는 인천 촌놈 최대호로 돌아가, 독서

를 했습니다. 자기 전에 하는 독서를 굉장히 좋아하는 데도 불구하고, 서울모드의 삶이었던 이전

방에서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홈페이지를 꾸미거나, 여하튼

무언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책도 재미있었고, 분위기도

고즈넉하니 아주 좋았습니다.



이제 그 정신없던 흐름에서 벗어나, 나는 대학와서 처음으로 '일상'을 시작해 봅니다. 어떤 것이 좋

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 혹은 이것마저도 일상이 아닐지 나는 잘 모릅니다. 어떻게 되든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공대 컴실을 찾았는데, 여러가지 기억들이

뛰쳐 나와 또 잠시간 키득거렸습니다. 오늘 하루 빼빼로들 많이 받으시길. 다음 일기는 열흘여만에

의 인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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