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논객' 노정태의 2014년 신작.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노정태의 논객시대'라는 코너로 진행했던 내용
을 묶어 한 권으로 출간했다. 부제는 '인문, 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어떻게 이렇게'가 아니라 '어쩌다 이렇게'라는 표현에서, '지금'은 매우 부
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상황이며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었던 '옛날'이 있었다는 저자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지금'과 '옛날'이 언제였는지를 적시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SNS에서만 뜨거웠던,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었던 2012년 대선의 과정과 결과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우리는 이미 죽어버렸고 열정이 식어가는 사회 속에서 간신히 숨만 쉬면서 살아가고 있다. (p 29)
...'그때'(따옴표는 내가 강조)는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던 나는, 그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10석을 차지하던 짜릿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997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2002년에는 몇 번이나 낙선할 줄 알면서도 지역갈등 구도에 정면도전한 어떤 신념의 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던 한국인들은 온 국민의 숙원이었던 월드컵 16강을 넘어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목격했고, 1인당 GDP는 2만 불을 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인 1997년이 한 차례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진보 정당의 국회 10석 차지, 노무현의 당선,
월드컵 4강, GDP 2만 불 등의 다른 모든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2002년이다. 조금 더 범박하게
말하자면 노무현의 시대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저자에게 있어 한국 현대사의 '긍정적' 최고점은 2002년, 혹
은 노무현 시대의 출발점이다. '진보' 정권이 '신념의 투사'를 후보로 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사회 인프라는
명백한 발전 도상에 있었으며, 문화와 경제에 걸쳐 유의미한 가치들을 성취해 냈던 한 때이다.
그러나 10년 후, IMF 위기 이후 꾸준히 이어져 온 왜곡된 사회 구조는 경제 뿐 아니라 정신, 사상적 측면에서까
지 그 구성원들을 적극적으로 압박하게 되었고, 보수 정권은 두 차례의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
때 그 시절'을 이끌었던 빛나는 담론들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맹위를 떨친 뒤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다. 아니, 2002년에는 그렇게 좋았는데, 그동안 뭐가 어떻게 됐길래 이런 2012년이 온
거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여 사건을 순서대로 재구해도 좋고, '강준만 식'으로 연표를 짤 수도 있다. 그러나 노정태
는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사건에 개입하고 발언해야만 했던' 여러 논객들의 이력과 전술을 교직하는 편이 지난
십 수 년간을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되살리는 데 가장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되어온 과
정 속에서 그 때 그 때마다 논객들이 글과 책의 형태로 내놓았던 발언들을 찾아내어 교차시킨다, 는 것을 구체적
인 방법론으로 택한 것이다. 평론의 대상이 되는 논객은 총 9명이다. 목차의 순서에 따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 우석훈. 김규항. 김어준. 홍세화. 고종석.
여기까지 정리해 놓고 한 차례 쉬도록 하자. 한윤형이나 박가분 등의 이름과 얽어 노정태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이
야기는 빠르다. 이들은 현재 진보 계열의 언론-평론가에서 손꼽히는 30대 초중반의 필진들이다. 몰랐더라도, 유
시민이나 김어준부터 출발하여 김규항과 박노자까지를 '우리'의 논객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그 정치적 당파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명백히 2014년 현재 위기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 진보-개혁
세력과, 좌절감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그 지지자들의 시선에서 쓰여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 시선에 동의하
지 않는 독자라면, 말하자면 스스로가 노정태의 '우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이 시도와 결
과가 통째로 무의미해 보이거나 불쾌할 수 있다. 이것이 본문을 설명하기도 전에 정리에 정리를 거듭한 이유이
다. 이 책은 '어느 한 편'의 이야기이며 그것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여기에 시비를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논쟁이 벌어질 여지를 줄였으니 이제 다시 책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정태에게
있어 현재란 '실패'한 역사이기 때문에, 그 과정과 영향을 주고받은 논객들의 현재 좌표 또한 추락의 선상에 있
는 것으로 파악된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까지 이런 실패를 할 정도였으니', 혹은 '이런 사람들이 이런
실패를 했으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꼭지마다의 주제는 '그가 어떻게 실패했나', 혹은 적어도 '왜 상승하지 못했나'를 밝히는 데에 놓여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당 논객의 1997년부터 2014년까지의 이력 가운데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주요한 변곡
점들을 소개하고, 그에 따른 말하기/글쓰기의 전략의 생성, 변화를 분석한 뒤, 그 영향을 고찰하는 식으로 구성
된다. 무슨 일을 겪었으며,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됐으며, 어떤 식으로 말/글을 내뱉었나, 그리고 그 말과 글
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 라는 것이다.
노정태의 시선에 동의하거나 공감한다면, 인물과 그 이력의 선택이 대체로 효율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저 이름들과 그들의 언행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강준만의 실명비판, 유시민의 지식소
매와 현실정치 참여, 박노자의 '냉소주의'나 김어준의 '선동', 그리고 고종석의 절필 선언 등은 분명 해당 시기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적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정태에게 동의하거나 공감한다면', 바로 여기에 이면의 칼날이 있다. 거듭 말하는 바와 같이 저 인물
과 그 이력이 한 단면을 넘어 사회 전체에 분명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재구해 내어 다시 곱씹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정태의 '우리'에 불과하다. 본래부터 '우리'가 아니었던 이들만 해도 사실은 현대사를
관통해 늘 다수였을일지도 모를 일이며, 적어도 노정태가 파악하는 '최고점'에 한정하여 '우리'였던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수가 여전히 '우리'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나의 20대를 바라
보며 쓴 책이기도 한 셈'이라는 서문의 한 줄을 흘려읽을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노정태의 '우리'란 실은 노정태 머리 속의 '20대의 나'를 수없이 복제한 가상의 집단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논객시대'를 재구해 내어 현재사를 다시 '현재화'하겠다는 이 책의 기획의도는 그 혼자나 혹
은 그를 둘러싼 소수집단의 욕망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한 쪽에 속한 정치적 입장을 함부로 '우리'라고 표현한 경솔함, 폭력성을 걷어내고 나
면, 청년 논객 한 명이 자기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라는 반론, 있을 수 있다.
나로 한정해 말하자면 위의 문제점을 딱히 문제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저자인 노정태와 생물학적 나이가 비슷한
덕에 나는 그와 비슷한 관점에서 현대사를 겪었다. 대통령과 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때쯤에는 이미 문민 정
부가 들어서 있었고, 청소년기에 김대중의 집권과 6.15 공동선언을 목도하였으며, -실제로는 응원 외에 딱히 한
일도 없었지만- 세계를 놀라게 한 월드컵 4강의 '주역'이었고, 지지율 2%의 대선 후보를 당선시켰다. '우리'에게
있어 개인과 세계(사회, 구조)의 거리는 그 어떤 세대보다 가까웠다. 개인이 마음을 먹고 집단을 이루면 개인을
둘러싼 세계는 반드시 변했다. '우리'는 그 물적 증거를 몇 개나 손에 쥐었다.
때문에, 개인과 세계와의 거리가 다시 현격하게 멀어져 버린 지금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로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논객 개개인에 대한 노정태의 평론 중 몇 개의 말단에는 동의하지 않지
만, 그 주된 문제의식에는 격심하게 공감한다.
공감하면 즐겁게 읽으면 될 것을 굳이 문제점을 찾으려 하게 된 것은 근래에 읽은 두 권의 책 때문일 것이다. 얼
마 전에 독후감을 올린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아직 독후감을 올리지 않은 권혁태의 <일본 전
후의 붕괴>이다. 각기 한국과 일본의 청년 세대를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 보이는 경향성 가운데에는 섬뜩하게
닮은 장면들이 있다.
'청년 세대'라고 범박하게 칭했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거대 서사'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나고 자란 10대,
20대를 가리킨다. 이들은 더이상 개인이 세계를 변혁하거나 뒤엎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혹은 아예 모
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세계는 원래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진보-개혁 세력이 입만 열면 내세우는 '전후 평
화'나 '민주화', '5월 광주' 따위의 입바른 소리에 '질려 버렸다'. 그건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거니와
'지겹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피해이기까지 하다. 그 소리를 듣고 앉아있을 바엔 남들 다 비정규직으로 나가떨어
지더라도 나만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기계발'에 매진하거나, 혹은 오타쿠나 히키코모리, 니트 족이 되어 자신
만의 마이크로 월드로 침잠한다. 세계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진실로 판명된다면, 이들
의 행동은 '합리적이고 현명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싸가지 없거나 한심하긴 하지만,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라는 의견. 있을 수 있다. 문제
는 그러한 경향성의 극단에서 분명한 연관성을 갖는 위험한 현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베'나 '재특회'로 상징되는 병적 증후들이다. 이들은 개인과 세계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자신만의 내
면으로 침잠하는 데에 이르렀다가, 그 외로움을 달래고 자기를 인정받기 위해 한 발 나아가 '천황'이나 '독재 정
권'과 같은 위악적 상징들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민주화니, 전후 평화니, 외국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이니, 지겹
다. 결국 너희들 잘났다는 소리이고, 나한테는 아무 득도 없는 지겨운 말 아니냐. 나는 너희가 싫고, 너희를 조롱
하기 위해서라도 정확히 그 반대되는 지점을 일부러 택할란다. 나는 약자를 괴롭힌다는 평을 듣든 악마의 길을
택했다는 평을 듣든 그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연대감과 소속감을 확립하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들이 바로, 노정태와 내가 속해 있는 '우리', 그러니까 '논객시대' 등의 고유한 이름을 갖고 호칭될 수 있는 거
대서사의 마지막 세대 바로 뒤에 오는 세대들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재특회나 보수 우익이 '전후'의 대척점을
찾아 둥지를 틀고, 일베가 '안티 - 민주화'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듯이, 고작 몇 살 차이이긴 하지만 형 뻘인
'우리'가 '우리 때엔 진중권이 날라다녔지', '나꼼수 집회 때 십만 명이 모였었어'라며 으스대고, '너넨 씨발 젊은
놈들이 그런 것도 없냐?' 라고 몰아부칠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물론 그렇게 '20대 개새끼론'에 몰려버린 이들이 반드시 일베나 재특회로 흘러들어가 평온을 찾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전에는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던 투표에 한 번쯤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
을 수 있고, 분명한 동기를 갖고 진지하게 현대사 공부에 매진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는 변하
지 않는다 - 나는 그걸 확실히 알고 있다 - 그런데 저 꼰대는 내 판단과 삶의 방식을 조롱하며 자신의 오래 전 훈
장을 갖고 으스대기만 한다'는 의식의 흐름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나는 우려하는 것이다. '재
수 없으니까 피하자' 정도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뭐가 됐든 큰 거 한 방 준비해서 저 새끼한테 반격하자'
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관련하여 권혁태의 책에서 읽었던 인상적인 언급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1995년, 일본에는 '옴 진리
교 사건'이라는 테러 사건이 있었다. '옴 진리교'는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1984년 일으킨 신흥종교단
체로, '옴 진리교 사건'은 이 종교단체가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스물아홉 명이 사
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주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부모 세대는 물질만 주고 정신은 교육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공허함을 느꼈다. 하지만 '옴 진리교'와
'전통적 일본 공동체(여기에서는 천황을 상징으로 하는 극우적 내셔널리즘을 가리킨다)'는 우리의 정신이 기댈
곳을 주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거대 서사를 잃어버린 세대'를 중심으로 하여 이들의 죄를 묻지 않거나, 나아가 옹호, 동경
하는 발언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옴 진리교를 악으로 규정하고 뿌리를 뽑으려는 '사회의 정의' 쪽에 더 큰 공포
를 느꼈다'든지, '옴진리교 신자들에게는 나에게는 없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열광했다'든지 하는 것이 그
것이다. 이 발언들에서 선악의 경계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꼰대들의 거대서사에 카운터로 날릴 '큰
한 방'이 있었을 뿐이다.
'독서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영신, <남동공단> (새만화책. 2013, 3.) (4) | 2014.05.07 |
---|---|
이철희, <뭐라도 합시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2.) (3) | 2014.04.25 |
로버트 셰클리, <불사판매 주식회사> (행복한책읽기. 2003, 4.) (3) | 2014.04.23 |
최석영, <혼신의 힘> (인물과사상사. 2014,2.) (2) | 2014.04.16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12.) (6) | 2014.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