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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최석영, <혼신의 힘> (인물과사상사. 2014,2.)

 

 

 

 

 

한 사람의 삶이나 한 사회의 역사는 부단한 인과관계의 결과물이다. 수백 수천 종의 학문적 연구와 체험의 증언

 

을 통해 재구해 낸 '실체'조차, 진짜 실체에 얼마나 근접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를 호령한 제국의 황

 

제가 실은 어릴 적 친구들보다 훨씬 작은 자기의 고추를 보고 심한 열등감을 느껴 패왕의 길에 나섰을지도 모르

 

는 것이고, 온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이 한 갑남을녀의 '썸'으로부터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한 순간의 표정, 혹은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의외의 지점들이 있다.

 

내내 선량하게 웃고만 있던 정치인이 정적들의 강한 공격에 윗입술을 까뒤집으며 짜증과 적개심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의 '밑바닥'을 본다. 계엄령 선포, 서울 10만 명 시위, 사망자 186명 등의 건조한 수치보다는 김주열의

 

사진 한 장이 4.19의 분위기를 느끼는데 훨씬 큰 도움이 된다.

 

 

 

저자인 '베스트블로거' 최석영 씨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인물을 통해 '한국사회의 특

 

징과 모순,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할 때, '싸이, 김연아, 이건희, 반기문' 같은 이들보다는 '지강헌, 황우석, 김기

 

덕, 홍석천'과 같은 이들의 행적과 그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다. 덜 유명하다고 해서 덜 중요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외적 인물', 즉 경계에서 노니는 이들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외연의 좌

 

표를 더 잘 가늠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본인이 오랫동안 거주하고 관찰하였던 일본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이러

 

한 문제의식을 적용해 보았고, 그 결과로 일본 사회와 일본인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뽑아

 

<인물과 사상>에 연재한 바 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다시 16인을 선정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부제는 '누

 

가 일본을 만들고, 흔들고, 버렸는가'이다.

 

 

 

16인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요약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총평부터. 일단 재미있다! '베스트블로거'로 활동하

 

였으며 웹진인 <딴지일보>의 해외필진이기도 했다는 이력이 보여주듯 쉽게쉽게 읽히는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

 

다 소재로 채택된 인물들이 스스로 걸어들어갔든 원치 않게 유폐되었든 '무대 뒤의 인물들'이라 그 독특한 삶의

 

행보에 눈길을 빼앗긴다.

 

 

 

이토추伊藤忠 상사의 회장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는 세지마 류조瀬島 龍三나 '바람의 파

 

이터'로 유명한 극진회관極眞會館의 최영의 관장 등은 전혀 낯선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자이니치로서 도쿄 긴자

 

의 최대 야쿠자 파벌인 도세카이東聲會를 이끌었던 '긴자의 호랑이' 정건영이나 우리에겐 제주도의 건축물로 더

 

유명한 '국민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등, 어디서 대충 주워들었던 이름들에 대해 드디어 조금이나마 제대

 

로 알게 되는 것은 몹시 반갑다. 국민들의 정치 혐오 현상을 문제삼는 우리 나라이지만, 정치 자체에 아예 아무

 

런 기대도 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 일본 사회에 홀로 관료주의와 낙하산 현상에 맞서 싸우다 암살당한 국회

 

의원(이시이 고키石井 紘基)이 있었다든지, 일본의 한 파친코 업체가 니콘보다 매출이 위이며 2012년 포브스에

 

서 선정한 재계 10위의 기업인데 그 사업을 밑바닥부터 키워나간 것이 한국인(한창우)이라든지 하는 사실은 예

 

상치도 못했던 일본의 단면이다. 책은 이러한 16인의 인물을 각각의 성격에 따라 '일본 속의 한국인들', '굴종하

 

지 않는 반항아', '개성파다운 사고', '현대 일본을 만든 거인'의 네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16인의 인물이

 

누구누구인지는 독후감의 끝에 출판사 제공 목차를 인용하여 소개해 두겠다.

 

 

 

여기서부터는 단점을 좀 적어보자. 일단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전문적 지식으로 활용할 만한 깊이는 못 된다.

 

20페이지 안팎의 분량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이력도 소개해야 하고 일본인이나 일본 사회를 잘 보여줄 인물로

 

그 이를 선택한 이유와 증거까지 보여줘야 한다. 이 이유란 대개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행보나 신념으로 압축

 

된다. 실제 한 사람의 삶이 그와 같기가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책의 주제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잘려나간

 

이력이 적지 않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알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런 특성은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이자 한편의 특장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흥미를 갖게 된 인물에 대해 독자가 스

 

스로 추가의 공부를 해 나가며 해결하면 될 일이다.

 

 

 

두번째 단점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이긴 한데, 퇴고에 약간의 흠결이 엿보인다. 이를테면 처음 등장하는 인명

 

이나 지명인데도 한자가 병기되지 않았다든지, 연도와 그 연도에 해당하는 인물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점이다. 전자는 한자 읽기에 큰 거부감이 없고 일본식 인명-지명 읽기에 흥미를 갖고 있는 독자인 내가 개

 

인적으로 갖는 아쉬움 정도라면, 후자는 어느 독자에게나 결례가 될 법한 실수로 여겨진다.

 

 

 

세번째 단점. 오고가는 이 많지 않은 이 블로그라도 혹여나 담당자가 보고 상처받을까봐 조심스럽지만. 인물과

 

사상사에서 내는 책들은 대체로 제목의 네이밍이나 표지 디자인의 센스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만약 이 지적을

 

접하게 되시면 센스로는 딱히 칭찬받는 일이 없는 일개 독자의 개인적 감상임을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 서운해

 

마시라.)

 

제목은 '혼신의 힘'인데 책의 내용에는 '혼신'도 '힘'도 별로 없다. 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해당 인물의 고달픈

 

인생사나 가치관, 혹은 독특한 개성 등이다. 물론 나름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근래에 접한 책들 가운데 네이밍의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사례였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표지 디자인. '대체로 무난하고 얌전하다'는 인상을 주었던 동 출판사의 다른 표지 디자인

 

들과는 달리 이번만은 책을 받아들자마자 '지저분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표지의 우측 하단에 등장하는

 

것은 최영의, 좌측 상단에 등장하는 것은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이다. 등장하는 16인부터가 서로 큰 공통점을

 

공유하지 않는데 이 둘이 굳이 대표로 호출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셋 중 한 명인 안토니오 이노키는 김일

 

편에 잠깐 소개된 '조연'이다.) 16인 중 네 명이 한국인이라는 점, 그리고 이 둘이 다른 둘인 정건영, 한창우에

 

비해 비교적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 정도가 이유인 것 같은데,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욱 어려운 것은 사진의 배치이다. 최영의 사진의 경우에는 조금 낫다. 제목의 마침표 부분에 배치되어 있으며

 

눈길을 끄는 강렬한 구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바짝 세운 왼쪽 팔의 날이 저자의 이름부터 쭉 떨어지는 직선

 

을 이룬다. 효과는 장담할 수 없으나 시각적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의 사진은 정말 어렵

 

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인만큼 최영의의 사진과 비율이 맞지도 않고, 좌측 상단에, 옆으로, 다리가 잘린채 배

 

치되었다. 특히 이 사진이 '지저분하다'는 인상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힘차게 쓰여진 캘러그래피 제목만 믿고 가도, 좀 재미는 없었겠지만, 괜찮지 않았을까. 아니면 전체의 내용에 부

 

합하는 별도의 사진이나 디자인이 있어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사소하다면 사소한 단점이다.

 

 

 

네번째 단점은 독자에 따라 심각할 수도 있다. '한 인물의 소개를 통해 일본인과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는 주제의식이, 전편을 통해 긴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적인 감상임을 전제하고 말하

 

자면, 몇몇 경우에 한해 작가는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가장 적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인물보다는 지금까지 한

 

국 대중 일반에게 잘 소개되지 않았던 분야의 인물을 '발굴'하는 데에 더 방점을 찍지 않았나 싶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을 뿐 '일본인'과 '일본 사회'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얻는 것

 

은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는 것을 넘어 유기적인 사회학적 메시지를 기대했

 

던 사람이라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아무튼 총평에 쓴 바와 같이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강의의 소재로 쓸 만한 흥미로운 내용도 꽤나 많이 메모하였

 

다. 남는 것이 있었던 독서인 셈이다. 넓직한 교양과 두툼한 두께에 가격은 만육천 원. 만족이다.

 

 

 

 

 

 

- 목차 소개

 

1부 일본 속의 한국인들, 그 파란만장한 삶
최영의 - 허(虛)망한 바람(風)의 파이터
정건영 - 현해탄에 떨어진 이카로스
김일 - 친일가에서 항일가가 된 영웅
한창우 - 그만이 할 수 있는 한류(韓流)

2부 굴종하지 않는 반항아로 한 시대를 살다
이시이 고키 -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우국의 폭탄 사나이
오치아이 히로미쓰 - 조직 사회 일본의 고고(孤高)한 개인주의자
이시와라 간지 - 만주국의 이단아, 이상 국가를 꿈꾸다
기타오지 로산진 - 세상사에 서툴렀던 맛의 달인

3부 개성파다운 사고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안도 다다오 - 고독과 싸우며 스스로를 세운 건축가
송웬저우 - 경제 대국 일본의 상식을 뒤엎은 화상(華商)
미즈키 시게루 - 요괴들과 함께한 신기한 인생
다하라 소이치로 - 일본 TV 토론의 권력자

4부 현대 일본을 만든 거인들의 명과 암
세지마 류조 - 난세의 군인, 재계의 정점에 서다
와타나베 쓰네오 - 일본의 미디어 제왕
사사카와 료이치 - 반공 우익과 기부 천사의 두 얼굴
다오카 가즈오 - 쇼와의 라스트 갓파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