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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은식,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한겨레출판. 2013, 11.)

 

 

 

 

1.

 

'야구평론가' 김은식의 2013년 11월 작. 인천문화재단이 한겨레출판과 함께 발행하고 있는 '문화의 길' 총서 기획의 일곱 번째 책이다. '문화의 길' 총서는 이 작품처럼 하나의 소재를 정해 두고 그를 통해 인천의 근현대사를 조망해 보는 일종의 지역문화사이다. 지금까지 총 일곱 권이 출간되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波市

 

2. 화교 문화를 읽는 눈, 짜장면

 

3. 질주하는 역사, 철도

 

4.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

 

5. 도시와 예술의 풍속화, 다방

 

6.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

 

7.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해안도시라는 지리적 특성을 보여주는 '파시'나 '짜장면', 서울의 외항이자 수도권 공업단지의 주축이라는 산업적 특성을 보여주는 '철도', '공장' 등을 보면 인천을 설명하는 데 잘 들어맞는 소재들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곱 번째인, 야구이다.

 

 

 

2.

 

야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인천의 야구팀은 삼십여 년의 프로야구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부침을 가진 팀이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1년 삼미수퍼스타즈로 시작한 인천 야구팀은 82년과 84년, 85년 모두 꼴찌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냥 꼴찌도 아니고, 인천 출신 소설가인 박민규의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해당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수퍼스타 감사용>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조롱과 멸시를 다른 팀과 한 치도 나누어 갖지 않는 꼴찌였다. 특히 마지막 해였던 1985년의 18연패는 아직까지 깨지지 는 최다 연패 기록이 되었다.

 

1985년 모기업인 삼미그룹의 경영난으로 인천 야구팀은 청보 핀토스로 유니폼을 갈아입게 된다. 꼴찌거나 꼴찌의 바로 위이거나 하던 청보 핀토스는 만 3년이 되기도 전인 1987년, 청보그룹의 도산으로 태평양화학에 인수되어 태평양 돌핀스로 개명한다. 여기에서 인천 야구팀은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구단주가 바뀐 팀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추가하였다.

 

태평양 돌핀스의 이름 아래 있던 1988년부터 1995년은 그나마 호시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88년과 93년에는 익숙한 꼴찌, 그 외의 해에도 대체로 꼴찌 바로 위를 맴돌았지만, 인천 연고팀으로는 처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89년과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했던 94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성근 감독이 이루어낸 89년의 3위는 반딧불처럼 반짝했던 83년의 전기 2위, 후기 3위의 기록으로부터 무려 6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인천의 야구 팬 가운데에는 이때부터 마침내 '인천 팬'이라는 동질적 집단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리고 96년, 현대그룹에 인수된 태평양 돌핀스는 네 번째의 새 이름을 걸고 야구장에 나선다. 문제의 현대 유니스이다. 모기업 현대의 파격적인 지원과 뛰어난 투수진의 영입으로 현대 유니콘스는 96의 준우승에 이어 98년, 인천 연고팀으로는 최초로 우승을 했다. 우승이 확정되던 6차전 날, 인천 공설 운동장을 채운 인천 팬들 가운데에는 차마 환호성을 내지 못하고 길었던 울음을 삼키던 이들도 많았다. 이 해는 인천 팬들에게 씻김굿과 같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000년, 현대는 루머로만 돌던 서울 행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IMF 때 모기업이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들을 물려받은 신생 팀 SK 와이번스가 전북에서 인천으로 연고를 옮기고 현대는 LG와 두산에 이어 서울의 세번째 연고 팀이 된다는 계획이었다. 

 

인천 팬들의 충격은 컸다. 현대의 서울 행에 관한 뒷소문은 전 해인 1999년부터 꾸준히 돌고 있었지만 모기업 현대는 몇 차례의 공식적 발언을 통해 이를 강력히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아울러, 삼사 년의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화려한 이력을 안겨 준 현대 유니콘스라는 이름에 인천 팬들이 갖게 된 애착도 애착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천고, 동산고와 같은 인천의 야구 명문 출신 선수들까지 팀과 함께 서울로 가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인천의 야구 팬들이 야구를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삼미-청보-태평양의 연패 기록보다 이 '현대의 배신' 사건을 꼽기도 한다. 이후 현대는 대주주인 현대전자의 재정난으로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고 SK와이번스의 제 2 홈구장인 수원구장에 임시로 자리를 틀었다가 2007년 결국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 때의 선수와 코칭 스탭들은 새로 창단된 우리 히어로즈, 현 넥센 히어로즈로 대거 흡수되었다. 멀게는 삼미 슈퍼스타즈 때부터 가깝게는 현대 유니콘스까지, 인천 야구의 인물과 문화를 '전승'하고 있는 팀이기 때문에, 인천의 야구 팬들 가운데에는 이 때부터 넥센 히어로즈를 응원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2000년, 문학경기장에는 다섯번째 팀인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연고 팀의 매각과 새로운 팀의 등장은 인천 팬들에게 낯선 경험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단지 모기업과 팀의 이름이 바뀌는 것 정도에 그쳤던 이전에 비해 SK 와이번스는 그 옛날 꼴찌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들이 주축이 된 팀이었다. 게다가 연고지 이전도 당초에는 서울을 희망했으나 현대가 이미 승인을 받은 뒤라 차선책으로 인천을 택한 팀이기도 했다. 인천 팬들로서도, SK 와이번스로서도 그다지 행복한 첫 만남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SK 와이번스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인 '스포테인먼트' 계획을 통해 인천 야구 팬들과의 유기적인 접점을 끊임없이 모색했으며, 특히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세 차례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세 차례의 준우승을 이뤄 내어 팬들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13년이 지난 현재 SK 와이번스는 인천 연고 팀 가운데 가장 긴 시간동안 머무른 팀이 되었다.

 

 

 

3.

 

이 책은 180쪽 가량의 분량 안에서 위와 같이 굴곡 많았던 인천 야구의 역사를 연대기 식으로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인터뷰와 분석 등을 통해 촘촘히 재구해 낸 프로야구 사에서의 이력 외에도,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 역사까지를 밝혀낸 사료적 가치이다. 1920년대, 일본 팀에 맞서 망국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던 한용단의 존재라든지, 인천 야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부의 연혁과 인맥상 등은 골수 인천 야구 팬이라 할지라도 모르는 이가 적지 않을 귀한 자료이다. 아울러 이런 자료들을 발굴해 내고 읽기 쉬운 문체로 잘 엮어낸 저자의 역량 또한 분명한 메리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천이나 인천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이에게는 큰 효용이 있지 않을 듯 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의 대부분은 객관적 사실을 복원하고 기록하는 데 편중되어 있으며, '인천의 정신'이나 '근대의 정신', 혹은 책의 부제인 '삶의 여백 혹은 심장'에서 기대되는 특정한 '주제 의식' 등은 서문과 에필로그 정도에서 편린적으로 엿보일 뿐 유의미한 성취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주 차갑게 말하자면, 이 책은 인천 사람이나 혹은 인천의 야구 팬인 사람을 위한 대단한 양질의 팬북이라고 해도 좋다.

 

 

 

4.

 

따라서 지금부터의 고백은 오로지 내가 인천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나는 프로야구 원년 삼미 수퍼스타즈와 함께 태어나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의 경기를 보며 자랐고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던 해 성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은 을 애면글면 긁어모아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다섯번째 팀에 줄 마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끝내 야구를 등졌다. 거들먹거리는 삼성의 팬이나 그악스러운 롯데의 팬들을 만나면 배아프고 창피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세울 것 없는 내 고향은 야구까지 이 모양이구나, 하고.

 

마침내 해묵은 위로를 받았던 것은 이십 대의 어느 날 동향의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삼미에겐 삼미의 정신이 있고, 꼴찌에겐 꼴찌의 철학이 있다. 그리고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또 하나의 위로. 부침이 있었든 비극이 있었든 인천 야구는 그 자리에 쭉 있었고 하나하나의 기록은 이렇게 모여 한 권의 역사가 됐다. 역사는 휘황찬란하지 않아도 역사이다.

 

이 책을 읽어보기 전 다른 사이트에 썼던 짧은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한국 프로야구의 팬들에게 상을 주는 자리가 있다 치자. 무지막지한 사랑을 보내준 열정상이나 충성상은 부산에 줘도 좋다. 프로야구의 상업적 발전에 기여한 공로상은 서울에 줘도 좋다. 하지만 만약 위로상이 있다면, 그건 인천에 줘라. 재론도 하지 말고 인천에 줘라.

 

'삼미 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서울 한 구석에 찌그러져 살고 있던 인천의 자식들에게 그나마의 숨통을 틔워준 선물이었다. 이번엔 소설이 아니라 직구로 인천 야구 백년사다. 닦아다오. 연안부두 바닷물처럼 흐르는 눈물 좀.

 

오랜 생각이었으나, 책을 읽고 난 지금의 나는 위로상을 받고 싶지도 않고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의 손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나의 눈물은 나의 역사가 닦아줄 것이다. 고맙다, 있어줘서. 인천의 야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