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이미 꽤 많은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이틀째에는 여유가 좀 있었다. 닭 한 마리 다 먹고 푹 자는 것 또한 집
나와서 누리는 호사 아니겠나 싶어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잤다. 두꺼운 커텐 덕에 세상 모르고 잤다.
창문을 열어 보니 여주 시내에는 이미 해가 쨍쨍. 시계를 보니 아침 아홉 시 반인데 도로에서는 벌써 김이 피어
오른다. 샤워하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아주머니는 하던 페인트 칠을 멈추고 얼음물 한 병을 더 챙겨주었다. 혹여
나 여주에 다시 가게 되면 꼭 또 들러야지.
출발 전 계기판 확인. 전날 한 칸에서 두 칸 사이를 오가며 속을 태우던 배터리는 밤새 전기를 흠뻑 마시고 만땅
을 채웠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사서 달린 총 거리가 453km인데 어제 하루 달린 거리가 122km이다. 푹 곯아떨어
질만 했구먼. 맨 밑 칸의 총 거리는 리셋이 안 되지만 그 바로 윗 칸의 거리는 리셋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날그날
의 이동 거리를 확인하는데 유용하다. 다시 0으로 맞추고, 출발.
자전거 종주를 시작하며 세운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아무리 전기자전거라지만 손잡이를 땡기면 스쿠터처럼 붕
하고 나가는 오토 모드는 쓰지 말 것, 그리고 아무리 안전한 길을 달리더라도 절대로 헬멧을 벗지 말 것. 그리고
첫 1박 2일 종주를 나서며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무작정 달려서 인증을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주위의 풍광을 감상해 볼 것.
새 원칙에 맞춰,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운 이틀째에는 4대강 자전거길의 인근에 있는 명승지나 랜드마크 등을 들
러 보기로 했다. 그 첫번째.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
남한강자전거길의 다음 거점인 여주보는 위 지도에서 숫자 333이 써진 부분의 조금 위이다. 그러니까 세종대왕
릉을 들렀다 가더라도 아주 약간 돌아서 가는 것에 불과하다. 거리로도 합당하고 직접 가 보고 싶은 마음도 충분
하다.
세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에 죽 늘어선 가로등.
색다르고 흥미롭다. 이런 것이라면 세금을 넉넉하게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바로 들어가면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 오른쪽으로 좀 더 가면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
이다. 효종대왕릉 입구까지는 1-2km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 굳이 돌아갈 필요 없이 세종대왕릉
안쪽으로 들어가면 효종대왕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세종대왕릉 입장료로 함께 이용 가능하니 참고 바
란다.
직선으로 죽 뻗은 길. '세종대왕릉'이라는 비석의 글씨를 보았을 때부터 조금 두근거렸는데 인적 하나 없는 왕릉
진입로를 한참 달려 가자니 기묘한 기분이 든다.
왕릉 진입로의 가로등.
용 장식이다. 세밀한 데까지 신경을 쓴 것에 괜스리 흡족하다.
도로 표지판에도 떡. '세종'이 쓰여진 자리에 조선의 다른 임금 이름을 넣었어도 이렇게 묘한 기분이었을까 싶어
이 이름 저 이름 넣어 보았는데 역시 세종만한 이가 없다.
입장료 500원을 내면 표를 받고 들어갈 수 있다. 세종의 왕릉 정도라면 국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해도 좋지 않을
까 싶다가도, 잘 관리해서 좋은 모습 보일 수 있도록 유지비 명목으로 500원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진의 왼쪽에는 세종 기념관과 세종 시대의 발명품들이 전시된 작은 공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관리사무소와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바로 앞의 돌길을 죽 걸어가면 왕릉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안에서 만난 서적, 전시물, 자연물 등 가운데 내가 가장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바로 이 알림판이었다. 금줄을
쳐놓거나 큼지막한 경고판을 게시해 놓은 것도 아니고 잔디밭 위에 작은 크기의 알림판 하나만을 놓아두었을 뿐
이다. 관광객의 양심에 맡겨두겠다는 의지도 느껴지고 '왕릉보호'라는 낯선 문구가 신선하기도 해서 서성거리며
한참 쳐다봤다.
왼쪽의 작은 건물이 제례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 오른쪽의 작은 건물이 신도비를 세워 둔 비각, 중앙의
큰 건물이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이다. 정자각 뒤로 봉긋하게 솟은 언덕이 세종과 소헌왕후가 합장된 능침이다.
건물과 주변 환경이 잘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조선의 왕릉 가운데 으뜸 가는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정자각 뒤쪽으로 돌아가면 능침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빨리 올라갈 수 있도록 직선으로 만들지 않고
원형으로 생긴 능의 원래 모양을 살리기 위해 완만하게 돌아 올라가도록 만든 마음씀이 곱다. 계단을 이루는 돌
이 빤딱빤딱한 대리석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든다.
중앙에 능침이 있고 좌우에는 문신을 나타내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장을 나타내는 무인석武人石이 호위하고 섰
다. 찬찬히 살펴보니 흥미로운 것이 많다. 왕릉의 장식에서조차 문신은 무장보다 윗 칸에 있다든지, 문신에게도
말이 딸려 있다든지 하는. 무보다는 문을 높이 쳤던 조선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배치라 하겠다. 아랫단
에 위치한 무인석 또한 본래는 왕릉 전체의 한 구성물일텐데 현대에 관광객을 위해 설치한 울타리를 기준으로
보면 왕릉 밖으로 밀려난 셈이 됐다. 이 또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처사이다.
혼백이야 어디 있는지 모르지마는, 이 흙무덤 아래 세종이라 불리우는 남자의 뼈와 살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 업적에 대해 새삼 다시 되새겨보게 됐다. 세어보면 고작해야 쉰 남짓한 생애 동안 얼마나 크고 위대한 공을
남겼나. 굳이 그의 뼈 몇 걸음 앞까지 와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한심한 일이지마는 평생에 한 번 곱씹
어보는 일 없이 사는 것보다야 낫긴 하겠지. 여주보 가는 길에 굳이 들러본 값이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나와서 거리를 측정해 보니 15분이면 가 닿는다. 여주시청 인근에서 하룻밤 묵은 뒤 여주보로
가는 길에 세종대왕릉에 꼭 들렀다 가길 강추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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