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遊記/2014 교토

2. 교토대 학생회관 - 은각사 - 철학의 길 - 남선사 - 헤이안신궁

 

 

 

 

술기운에 푹 자다가 아침 외풍에 깼다. 어렸을 때 어디선가 '일본에서는 집에서도 옷을 겹쳐 입고 특별한 난방을 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나라에 와서 팬티만 입고 잔 내 잘못이다. 술이 완전히 깬 것은 아니지만 여행에서의 시간은 귀하니까 눈을 뜬 김에 일어나기로 했다.

 

 

 

 

 

 

 

 

지구호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무라야의 모습.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가정집인양 시침 뚝 떼고 있다. 새벽 세 시에도 성업이니 언제 문을 여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저녁 여섯시에서 열시쯤에나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2층의 저 뻥 뚫린 방인데, 항시 열려있는 것이 일단 수상하고, 영업 시작하면 불을 켜는데 그것도 새빨간 불이거니와, 방 안에는 사람 하나 없이 기묘한 형태의 마네킹과 가면, 그리고 주렴이 그득그득하였다. 새벽에 방에서 나와 문득 쳐다보았을 때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나오는 유바바 할멈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솥을 젓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속을 달래려 비척비척대며 편의점으로 갔다. 한국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익숙한 모습들을 지나치다가 아, 확실히 일본에 왔구나 하고 실감한 첫번째는 판매대에 그득한 만화책.

 

 

 

 

 

 

 

 

술 마셔서 멍청한 머리로, '앗, <칠석의 나라>, 일본에도 있네'하고 생각했다. <칠석의 나라>는 원래 일본 만화. <기생수>의 작가가 그린 작품이다.

 

 

 

 

 

 

 

 

아직도 현업에 계신 고르고 형님. 반갑습니다.

 

 

 

 

 

 

 

 

우리나라가 빠른 것일까 일본이 느린 것일까. 내 모국에서는 가수마다 '렛 잇 고'를 불러대던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 안 나는데 이곳에서는 엘사 음료가 신상품.

 

 

 

 

 

 

 

 

야채음료를 사서 꿀꺽꿀꺽 마시며 돌아오는 길에 찍었다. 갈림길을 기준으로 바로 왼편이 숙소인 지구호, 오른편이 술집인 무라야. 두 골목의 합수점에 작은 신전이 있다.

 

 

 

 

 

 

 

 

 

 

 

어쩐지 뚱한 얼굴의 신. 별 영험함이 없을 것 같아 이 앞을 지날 때마다 인사는 했어도 소원은 빌지 않았다.

 

 

 

 

 

 

 

 

짐을 챙겨들고, 하루를 시작하며 햐쿠만벤 사거리에서 들른 백 엔 샵. 요렇게 별 것 아닌 데에도 캐릭터를 넣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보았다. 대입시험에 일본어 과목이 있었던 탓에 십수년이 지났지만 더듬더듬 읽어보았다. 

 

'영원히 아름다운 눈썹 아이브로우. - 원래 눈썹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쯤 되려나.

 

 

 

 

 

 

 

 

여기서부터는 한자 말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일본어를 잘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왼쪽은

 

'눈물이 흘러도 밀착 아이라이너'

 

이고 오른쪽은

 

'바람에 지지 않는 아이라이너'

 

이다. 뜻풀이를 듣고는 한참 웃었다.

 

 

 

 

 

 

 

 

숙소에서 나오면 바로 교토대학 학생회관이다. 뭐 좀 재미있는 게 있을까 싶어 어슬렁거려보았다. 내가 들어간 쪽은 운동부 동아리의 동아리방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합기도부. 웰컴은 사양하겠습니다.

 

 

 

 

 

 

 

 

소림사 권법부.

 

 

 

 

 

 

 

 

그리고 경대 공수도부. 나무 간판이 멋지다. 이 앞의 공간에서는 공수도부 신입생들이 핫 핫 소리를 질러가며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 여행의 초반이라 수줍음이 많았던 탓에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교토대는 숙소 옆에 있으니까 들어갔던 거고. 교토의 첫 공식일정은 '철학의 길' 루트. 철학의 길 입구에 아이스크림 남매가 있길래 찍어봤다.

 

교토 주민이나 연구자가 보시면 터무니 없겠지만, 교토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단히 거칠게 잘라 말하자면, 교토의 관광 지리는 크게 정사각형으로 보면 된다. 유명한 지점 몇 개를 찍어 설명하자면,

 

정사각형 아랫변 중간이 출발점인 교토역, 

 

윗변의 왼쪽이 금각사 라인,

 

오른변의 윗쪽이 은각사 라인,

 

오른변의 아랫쪽이 기온-청수사 라인

 

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 관광의 필수 중 하나라고 꼽히는 이 '철학의 길'은 오른변의 맨 위 꼭지점인 은각사로부터 오른변 중간 쯤의 남선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교토 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일본 현대 철학의 기반을 세운 이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니시다 기타로(西郎)의 출근길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유홍준 선생님은 이 '철학의 길'과 니시다 기타로의 개략적인 업적까지 책에 정리해 주었다.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은 아주 작고 귀여운 산책로이다. 일자로 된 좁은 수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약 2km 정도를 걷고 있으면 은각사, 영관당, 남선사 등의 굵직굵직한 문화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거기에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단풍이 흐드러진다고 한다. 11월 말인데도 분지인 교토는 아직 초봄처럼 따뜻해서, 나는 아직 많이 남은 단풍 사이를 걷다가 땀이 나서 가죽잠바를 벗어야 했다.

 

사진에는 잘 안 나왔지만 쓰고 있는 안경은 평소 쓰는 것이 아니라 정지용 코스프레를 위해 건대입구 노점상에서 만 원 주고 산 동글백이 안경이다.  

 

 

 

 

 

 

 

 

예쁜 돌. 그러나 술이 덜 깬 나는 치즈가 먹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철학의 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비석. 새겨져 있는 것은 니시다 기타로의 글이다.

 

 

 

 

 

 

 

 

글씨가 필기체이고 한자는 '사람 인人'자 밖에 없으니 일본어를 모르는 이라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유홍준 선생님은 이 자그마한 비의 내용까지 해석해 주었다.

 

"사람은 사람. 나는 나. 어찌 됐든 내가 가는 길을 나는 간다."

 

물론 선생님의 해석이 옳겠지만, 한문 고문에서 '사람 인人'은 대체로 '다른 사람'으로 새기니,

 

"남은 남. 나는 나. 어찌 됐든 내가 가는 길을 나는 간다."

 

라고 하면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서양 철학에 대비해 '일본의 철학'이라 불리울 만한 체계를 확립했다는 니시다 기타로다운 말이다.

 

 

 

 

 

 

 

 

길가의 한편으로는 가게도 있고 민가도 있다. (실례이지만) 남의 집 앞에 앉아 사진도 찍어보고 기념품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만져도 보고 하는 재미에 2km는 정말 금방이다. 한봄과 한가을에는 사람이 미어터져 걸을 수가 없다는 말도 영 거짓말은 아니다 싶다. 

 

 

 

 

 

 

 

 

앗 찾았다 요지야. 나는 교토 여행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여성 동지들에게는 유명한 브랜드라 한다. 특히 기름종이가 유명하다 해서 복수의 여성으로부터 기념품으로 사올 것을 부탁받았다. 아니 뭐 그런 심부름을 시킨담 기념품은 내가 알아서 사는 거지 하고 툴툴거리던 마음도 10장에 3천원 꼴인 것을 보고는 대번에 풀어졌다. 그러나 요지야는 크게 뻥 치자면 교토 내에 한국의 치킨집만큼 지점이 있으니 굳이 여기서부터 사서 들고댕길 필요는 없다.  

 

 

 

 

 

 

 

 

 

 

 

 

교토는 자연물조차도 채도가 높은 것처럼 느껴진다. 쨍한 붉은색과 금색으로 치장한 절과 신사에 맞서서도 화려한 색을 떨치는 단풍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철학의 길의 왕된 자들은 바로 고양이. 뒷사람에 쫓기고 시간에 쫓겨서 총총걸음치는 인간들 사이로 따뜻한 한 자리 좋게 차고 앉아 늘어지게 잠을 잔다. 

 

 

 

 

 

 

 

 

 

 

 

 

 

 

 

 

 

 

 

 

왕의 품격에 어울리는 마차도 갖고 있다. 이 때엔 다섯 마리 정도 뿐이었지만 열흘쯤 후 아침 나절에 혼자 지나가며 보니 십수 마리가 앉을 수 있는 곳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남선사(난젠지)의 삼문三門 위에서. 교토에서 손꼽히는 크기의 삼문이라 하고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 또한 절경이라 하지만 고소공포증에 고통받는 나는 표정을 굳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꼭 쥐고.

 

 

 

 

 

 

 

육지로 내려와 교토 시내를 가로지른다. '교토는 정사각형' 비유를 다시 가져오자면, 오른변 맨 윗꼭지점서 시작해 오른변의 중간꼭지점인 남선사까지 와서 정사각형의 중심점인 산조, 시조 방향으로 걷는 중이다. 점심 무렵에 걷기 시작해 저녁 즈음이면 끝나는 도보이니 교토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다.

 

 

 

 

 

 

 

 

교토의 날씨는 무척 변덕스럽다. 십여 분 비가 오나 했더니 어느새 구름이 개고, 그러면 이젠 됐겠지 싶으면 다시 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어설프게 가랑비 맞느니 옷이 푹 젖어도 좋으니까 차라리 시원하게 퍼부었으면 좋겠다 싶은 우리네 성미로 보면 속터질 노릇이다. 그래도 그런 날씨가 갖는 장점이라면 갑작스런 무지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름 정도 머물면서 위의 사진보다 선명한 무지개를 적어도 두 번은 더 보았던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길가에 바로 붙은 절에서는 낡은 목상이 사람과 함께 석양을 받는다. 이 기묘한 풍경이 교토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교토 중심부의 번화가에서 들어간 오키나와 음식점.

 

 

 

 

 

 

 

 

이것은 톳 같은 것을 튀긴 것이다. 부추전 비슷한 맛이 난다.

 

 

 

 

 

 

 

 

돼지고기 요리. 이와 함께 오키나와의 대표음식인 참푸루도 시켰는데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한 양에 놀라 그만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부분 혼자 여행을 할 테니까, 좋은 데 가면 배경에 놓고 찍어야지 하고 가져갔던 레고 미니피규어. 그렇지만 이 이후로는 한번도 안 나왔다. 후일을 위해 열심히 찍고 기록하고 하던 이전의 여행과 달리 이번 교토 여행은 대체로 교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분위기에 젖어 걷다가 감상하다가 먹다가 마시다가 하다가 돌아왔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교토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 침대에 누워 동강동강거리며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출출해져 편의점에 가보니. 말로만 듣던 일본 편의점 도시락이 떡. 저 구성에 600엔도 안 된다니 믿기 어렵다. 여행 당시 환율로 5500원이 조금 넘을 것이다. 그나마도 나는 첫날이라 멋도 모르고 신나서 저걸 사 먹었지만 다음부터는 반액 세일 시간을 노려서 갔다. 반액 시간에 가면 저 구성이 3000원도 안 된다. 먹을 수밖에 없는 거다.

 

숙소의 거실에서 맥주 큰 캔 하나에 스시를 안주 삼아 배불리 먹고 잤다.

 

 

 

 

 

'遊記 > 2014 교토'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 금각사 라인  (0) 2015.01.26
3. 오사카 1일차  (0) 2015.01.26
1. 출국과 도착  (0) 2015.01.26
0-2. 출국 전에  (0) 2015.01.25
0-1. 교토京都로  (0) 2015.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