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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1

토요 미스테리 극장





놀토가 없던 90년대 학생들의 고된 토요일의 끝에 큰 위안이 되어주던 <토요 미스테리 극장>. 배우 전무송 씨가 특유

의 음산하고 지친 목소리로 진행을 보았던 일종의 재연 프로그램이다. 전무송 씨는 영화 <기담>에서도 나레이터 역할

의 배역을 맡은 바 있는데, 아마도 감독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싶다. 1회부터 60회까지 모아놓

은 화일을 누가 올려놓았길래, 언젠가 보겠거니 하고 다운을 받아두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에어컨이 나오는 집에서 며칠을 자다가 다시 신촌 방으로 돌아왔다. 내 돈 주고 살았던 방 중에

서는 마음 속 왕좌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연희동 귀족집이었는데, 18'c 바람일랑은 추억에 묻고 선풍기 옆에 앉

아 있자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든다. 양로원 할아버지처럼 두루마리 휴지 한
 
칸 두 칸씩 떼어 틈날 때마다 눈 미치는 곳을 훔치던 것은 마치 상고시대의 일이었던 듯, 아이스크림 봉지고 이면지고

간에 대충 구겨 아무데나 집어던진다. 선풍기의 스펙트럼에서 조금반 빗겨 앉아도 땀이 흐르는 판이라 뭔가 묘수가 없

을까 하다가 궁여지책으로 하드 구석에 쟁여뒀던 토요미스테리 극장을 재생시켜봤다.


90년대 작품이고 게다가 TV프로그램인데 뭐. 코웃음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지. 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앗 소리가 쉴 새

없이 나오는 이런 프로를 사춘기 때 봤으니 내가 이렇게 피폐해졌지 하는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깜짝깜짝 놀라면서 봤

다. CG라고는 하나도 없고 귀신들의 분장도 형편 없는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몰입을 시키는 플롯 덕에 멍 때리며
 
몰입하다가 갑자기 나온 귀신에 앗, 저기서 나올 거야 하고 조마조마 신경쓰며 보고 있었는데도 앗. 고전은 시대가 바

뀌어도 고전, 역시 핵심은 테크닉이 아니라 스토리와 캐릭터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아무튼 일고여덟 편 몰아서 잘 봤

다. 덕분에 낮잠 자다가 귀신 꿈도 공짜로 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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