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11

개천에서 용 찾기



매 주 보지는 않고, 이따금 구미가 당기는 제목이 걸리면 찾아 보는 <MBC 스페셜>. '개천에서 용 찾기' 편은 지난 봄

에 다운받아 놓고 별 내용 있겠나 싶어 미뤄두었던 것인데, 지난 주인 7월 29일 방송된 '김제동-박경철-안철수' 2편

을 보고 흥을 가라앉히지 못해 다시 꺼내어 시청했다. 같은 프로그램이라 무의식적으로 재생시키긴 했지만, 1편에 이

어 점차 공고한 삼각편대를 이루어가는 김박안 트리오의 활약을 보고 난 뒤라 얼마나 재미있겠나 싶었는데, 별 내용
 
없더라도 일기를 쓰고 싶어질 정도로 흥미롭게 봤다.






인트로 장면. 개천이라도 여러 개 있을텐데 일부러 청계천에서 찍질 않나, 개천에서 난 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

개하면서 각하도 슬쩍 끼워넣질 않나, 아무튼 분발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판에 부장님은 PD들 서

랍을 뒤지고도 시침 뚝 떼고, 사장님은 사표를 내네 마네 땡깡을 부리고 계시는 MBC. 힘내주기 바란다.







이 분이 얼마 전 독서일지에서 소개했던 <한국인의 심리코드>의 저자 황상민 교수. 대체로 책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말씀 하셨다. 얼굴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올린다.







박경철 원장과 안철수 원장을 비롯해, 요새는 강연과 사회활동 등의 다각적인 통로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충고를 건네는 선배들이 많아졌다. 대체의 요지는 '노력하라'와 '도전하라',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이다.
 
이력과 언행을 살펴보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고 감동하지 않기 어려운 이들의 발언이긴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의
 
전제와 그들이 주목하는 지점의 선후관계에 조금 불만을 갖는다. <한국인의 심리코드>를 읽으며 들었던 불만과 대동

소이이긴 하지만 다시 정리해 보자면.


하나. 박경철 원장만이 조금 다른 스탠스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안철수 원장, 조국 교수, 박원순 소장 등이 끊임없이 젊

은이들에게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라고 조언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본인들이 각기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손에
 
꼽힐만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안철수 원장이 20대의 중후

반에 이미 최연소 의과장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밟아온 명문 코스만으로도 지능을 의심할 수 없는 조

국 교수나 자료 수집과 정보 처리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가졌으며 짧은 수면 시간으로는 각하 못지 않다는 박원순 소

장 등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찾아보면 분명히 잘 하는 게 있을 거다. 그걸 하다보면 크게 성공하고 돈도 벌

수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프로그램 중에 소개된 위의 표에서는 김연아와 박지성, 법정 스님 등이 캐

리커쳐 처리를 통해 강조되었으며, 방송 중에는 '광고천재' 이제석과 '뉴욕 패션계의 기린아' 최범석의 인터뷰가 나왔

는데, 과연 청소년과 20대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만 된다'면 저들이 될 수 있을까? 

김연아만큼은 안 되어도, 박지성만큼은 안 되어도 대기업에 들어가 비윤리적인 삶을 살거나 중소기업에 들어가 착취

당하며 사는 것 보다는 좀 괜찮게 살지 않겠나, 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반론에 당신은 '김연아 만큼은

안 되지만 꽤 괜찮게 사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의 이름을 실제로 알고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마찬가지 아니겠는

가. 박지성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했던 유소년 축구선수는 지금쯤 지방에서 운동 물품점을 하며 전세가 폭등에

따라 입점세가 올라갈 때마다 소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석 보다는 조금 덜 유명했지만 실력은 괜찮았던

어떤 광고업계 유망주는 재벌 총수의 자식들이 차린 계열사가 대기업 광고를 쓸어모으며 수 년 만에 업계를 호령하는

꼴을 보고 눈물을 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효할 만한 수량의 구체적인 사례 없이 영웅적 인물들의 빛나는 순간만을

들어 '노력, 근면, 자기계발' 등의 추상적 구호를 외치는 것은, 나도 대부분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라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일종의 기만이 아닌가 생각한다. 


둘. 그래서, 우리와 같이 '평범한'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말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구조의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 좀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노력을 하면 서울대 나온 부자집 아들놈보다 성공하고 잘 살 수 있을까' 말

고, '어떤 사회를 만들면 지방대 나와서도 적당한 집 한 채 장만하고 퇴직 후엔 취미를 즐기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악한 예이지만 하나 들어 보자면. 오늘 오후 고용노동부에 의해 내년 최저임금이 4,580원으로 최종 고지됐다. 노동

계와 최저임금연대가 주장하던 5,410원보다 830원이나 적은 금액이다. 4,580원일 경우 8시간 근무시 임금은 36,640

원, 주 40시간제의 월급은 957,220원이다. 만약 5,410원으로 결정되었다면 하루 임금은 43, 280원, 월급은 주 40시간

제에서 1,130,690원이다. 과외수업 등을 통해 회사원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소수의 명문대 학생들을 제외하

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생계나 등록금의 벌이를 위해 택하는 PC방 알바, 주유소 점원, 편의점 점원 등이 위의 직업

군에 속한다. 물가상승률 4%, 대학등록금 상승률 평균 8-9%인 상황에서 이런 젊은이들에게 한 달에 약 17만원의 차

이가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최종안은 지난 7월 중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사용자측 위원

과 공익 위원만이 참가한 가운데 처리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 안을 지지한 '사용자측 위원'은 누구인지, 그리고 최저임금연대가 주장하던 5,410원에 동의한 여섯 개 정

당과 동의하지 않은 한 개의 정당은 어디인지를 밝혀, 젊은이들에게 투표를 통해 실질적으로 의사를 반영토록 하는 것

이, 어떻게 하면 페이스북 같은 회사를 만들지, 어떻게 하면 첼시나 맨유가 계약을 맺으러 올만한 세계적인 선수가 될

지를 독려하는 것보다 더 현실성 있고 따라서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을 일러 주고, 그리고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생활 속의 직접적인 혜택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 개천에서 용 안 나온다 한탄하지 말고, 없는

용 나오라고 개천에 헛되이 소리 지르지도 말고, 망둥이도 꼴뚜기도 제 자리 하나 차고 앉아 편히 살 수 있는 너른 호

수를 만드는 것.


물론 위에 소개된 분들은 트위터, 방송 토론, 서적 출판등을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 또한 끊임없이 전달하고 계신 분들

이다. 하지만 특히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좌담회, 강연 등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기조 때문인지 어조가 개

인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 함몰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 굳이 지적해 보았다. 그러나 촛불 집회

와 반값 등록금 집회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혹은 관심을 가졌지만 환멸을 느끼고 있는 젊은이

들도 생활과 밀접한 이슈에는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이 에너지를 '구조의 개혁'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돌리는 데에 위

에서 거론된 분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해 주시리라 기대한다. 
 






여기부터는 여담. 한 편의 베스트셀러 덕분에 이름값을 얻어, 그의 책을 안 읽었거나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트

렌드 리더'나 심지어 - 미래를 예측한다는 책 내용 때문인지 - '진보적 지식인'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공병호 소장. 개

인적으로는 빨리 전 국민이 그 정체를 알았으면 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MBC 스페셜>에서도 그의 유명세가

마뜩찮았는지, 위의 화면은 그가 한 대학 입시 설명회에서 '아이의 승진 가능성, 보수, 인맥, 모두를 좌우하는 것은 영

어이다'라고 학부모들에게 썰을 파는 장면이다. 그 뒤에는 학부모들의 '돈이 없어서 영어를 못 가르쳐요', '강북 엄마

인데, 강남 엄마들과 이야기해보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해요'라는 인터뷰가 붙어 있어, 멍때리며 시청하다간 대한민

국의 그런 '10년 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꼭 공병호 소장인 것처럼 보인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리지도 않지 뭘.







마지막.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들 가운데 하나.


- 한국사회에서의 성공은 2대부터의 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1대부터 쌓아온 재력이 3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 그 1대의 재력은 2대를 거치고 3대가 장성하는 때까지 변함이 없거나 증식되었다.

- 입시 시장이 '정보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실력'만을 평가하는 공명정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등의 대단히 가치판단적인 명제들이, 위와 같이 구어적 생명력을 갖는, 즉 라임을 맞춘 '프레이즈'로 정리되었다는 것

은 그것이 이미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지닌 연구소

, 혹은 여론조사 기관 등에서 조사하여 발표하는 것보다, 학부모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이런 '신종 속담'들을 눈여겨

보는 것이 오히려 세태를 더욱 적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나는 저 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감정을 가졌다. 재력을 갖춘 1대라면, 해방 후

와 군부 철권 정치의 무법천지 사회에서 손에 흙을 묻히지 않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 재산을 승계한 2대라면 아

마도 특정 신문, 정당과 오랜 시절 이해를 같이 해 온 직종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정보력'을 갖춘 엄마라면 1가구 2

차량 시대를 주도한 세력으로, 학교 끝난 애를 차에 태워 첫번째 학원에 배달시키고 두번째 학원에 배달시켜 가며 내

새끼한테 손 댄 선생들 찾아가 따귀를 올려붙이는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부자집'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 구성원들에 대해 막연하게 갖는 이미지이자 질시, 혐오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

다. 그런데 저 화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디에 쓰일 줄도 모르면서 악착같이 벌기만 하다가 죽은 할아버지, 집에선 키

우는 애완견보다 무시받고 룸싸롱 가서 딸 뻘 되는 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중년, 그렇게 애를 써서 키워놓고도 자

식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한편으로 그들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못했

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래도 소설이지. 이건 현실이다. 이쪽이 이겼다.



'일기장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1) 2011.08.07
화석  (0) 2011.08.06
본 꼼쁠레아노, 까멜로.  (0) 2011.07.30
토요 미스테리 극장  (7) 2011.07.26
다녀왔습니다.  (0) 2011.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