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12

여권사진 무료촬영





흥미로운 뉴스를 보았다. 다음은 기사 중 일부이다.



행정안전부와 외교통상부는 지난 3일 여권용 사진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사진이 법정 요건에 맞지 않을 경우, 여권 신청을 받는 시

·도, 시·군·구 민원실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무료로 촬영해 주는 '여권 사진 얼굴 영상 실시간 취
득시스템'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정

부는 우선 올해 말부터 외교통상부와 10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범 실시한
다음, 내년 말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쉽게 말해 여권에 들어가는 사진을 나라에서 공짜로 찍어주겠다는 정책이다. 기사에 따르면 민원실 내에 촬영

기기와 장소를 마련하는데 약 700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전국 단위의 정책 치고는 크지

않은 규모의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고, 유사한 성격의 공적 문서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에도 이미 민원실

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왜 진작 이런 정책이 고안되지 않았던가 싶다. 여권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돈

도 돈이지만 이 정책으로 여권 발급 과정에서 겪는 곤란함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위의 사진은 십여 년 전 학부의 학생증을 취득할 때 찍었던 것이라 귀걸이도 하고 빵모자도 쓰고 있고 하지만,

나도 몇 년 전 인도에 가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을 때에는 시청 옆의 사진관에서 사진사한테 옆머리를 귀 뒤로

확실히 넘기라느니, 남자가 귀걸이는 빼라느니 소리를 들어가며 불쾌한 촬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도 귀

가 덜 나왔다고 공무원에게 퇴짜를 먹고 다시 가서 재차 사진을 찍어야 했던 것이다. 위의 정책이 시행되고 나

면 내 경험담도 곧 먼 옛날의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터이다.



하지만 이 정책을 소개한 기사에는 정책의 시행으로 피해를 보게 되어 반대를 하는 이익단체들의 주장도 실려

있었다. 사단법인 한국프로사진협회인데, 이 협회 소속 1400명의 사진사들은 내일인 1월 27일 보신각 앞에 모

여 스튜디오 용 카메라를 부수고 삭발을 하는 퍼포먼스를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에서 협회의 비대위 본부

장인 이재범 씨는 정책을 반대하는 근거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었다.



하나. 여권 사진을 찍는데도 상당한 전문 기술이 필요한데, 공무원들이 사진을 얼마나 잘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둘. 여권을 발급받아 외국에 나가는 사람은 일부 계층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무료 촬영을 위해 700억 원의 세금을 쓰는 것은 문

제이다.



셋.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에 등장한 이후, 사진관 60~70%가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관 중 70%가 여권·증명 사진으로 돈을

벌고 있다. 이들 사진관은 연소득 3000만원 정도로 영세하다.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는 정부가
오히려 일자리를 없애려고 하고 있

다.




첫 번째 이유는 아마 사진사 본인들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면을 보고 찍기만 하면 되

는 여권 사진에 무슨 기술이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고화질 스마트 폰의 보급이 이미 천만 대를 넘어선 판에,

공무원이라고 사진을 잘 찍지 말란 법이라도 있는가. 스마트 폰이나 DSLR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데 익숙한 젊은

층들이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혹여 해당 공무원이 사진을 잘 못 찍

었다 하더라도 같은 부서나 연관 부서의 공무원이 허가를 내 주는 것인데 잘 안 찍혔다고 굳이 반려시킬 리는

만무하다.


두 번째 이유도 억지에 가깝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출국하는 여행객 수는 2008년에 약 천이

백만 명, 2009년 약 구백오십만 명, 2010년 약 천이백오십만 명, 그리고 2011년 상반기까지 약 칠백사십만 명

에 달한다. 최근 기사에 따르면 올 설 연휴동안 해외여행을 떠난 여행객은 총 삼십육만 명이라고도 한다. 해당

수치 안에 영업 사원들처럼 한 해에도 수 차례 해외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한 명으로 잡혔는지, 아니면 매 회당

다른 인원으로 잡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여 후자라 하더라도 전체 국민의 1/10에서 1/5 사이의 인원이 해외

여행을 떠나고 있다면 이것을 '일부 계층의 경험'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대응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사진사들의 주장을 일축할 수만은 없는 것은 세 번째 이유 때문이다. 거리를 나다니며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사진관의 규모는 영세한 수준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상대적으로) 대기업의 가맹점들

도 있지만, 그 행태가 제빵업계나 분식업계 등과 같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물량으로 쳐들어와 시장을 초토

화시키는 수준의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곧, 사진사들도 자영업 지옥 대한민국의 서민들 중 일원이다. 기술이
 
발전하여, 이들이 수행하고 있던 작업들 중 대부분을 일반인도 충분히 스스로 할 수 있게 된지 오래인 것이 사

실이다. 웨딩 촬영이나 아기 촬영 등의 작업에서 필요 이상으로 요금을 청구하는 것을 보고 눈쌀을 찌푸린 경험

은 내게도 있다. 그러나 개개인 간의 이러한 인식과 상관 없이, 국가가 하나의 이익 단체를 구성할 정도의 수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생업과 관련해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그에 대한 대비책 또한 고려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수의 편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소수의 '밥줄'을 끊어놓는 이 가치관이

다른 정책에서는 또 어떤 소수를 잊고 있을까.




'일기장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물  (2) 2012.01.28
당명쟁명(黨名爭鳴)  (1) 2012.01.27
무슨 사연 있관대  (0) 2012.01.22
셸든은 게임 안에서 산책이라도 하지  (0) 2012.01.21
'허니문푸어, 빚과 결혼하다'  (2) 201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