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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남규홍, <출세 만세>

 

 

 

 

 

 

SBS 교양국의 PD인 저자가 2010년 신년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던 '나는 한국인이다' 시리즈 4부작 <출세만

 

세>를 정리하고 방송에 나가지 못했던 부분들을 덧붙여 낸 책이다. 저자는 2011년에는 신년특집 '나는 한국인

 

이다' 3부작 <짝>을 제작하였고 이후 정규편성된 <짝>의 PD를 맡아 지금까지 재직해 오고 있다. 2012년 신년

 

특집이었던 <만사소통>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이다' 시리즈를 모두 즐겁게 시청하였고 그 중 <출세만세>와 <만사소통>은 영상화일로도 갖고 있

 

다가, 이런 책이 출간된 바 있었다는 것을 알고 찾아서 읽어 보았다. (저자는 이후 <짝>도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

 

다. 이후의 독서를 기약한다.)

 

 

책은 총 4부인데, 순서는 바뀌었지만 방송 프로그램 4부의 구성과 동일하다. 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들을 문

 

자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정리하고, 시간상 들어가지 못했던 미방영분, 기획의도, 그리고 부연 설명등이 덧붙여

 

져 있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책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보셔도 상관없고, 인상적인 자료를

 

인용하거나 좀 더 깊은 내용을 접하고 싶은 분들은 책을 읽으시는 것이 좋겠다. 기발한 구성과 담백한 문체가 읽

 

는 맛을 돋는다.

 

 

 

1부 '출세의 이유'에서는 프로그램 중 화제를 낳았던 '완장촌' 편을 풀어 설명하고, 사람들은 왜 완장을 차고 싶

 

어하는지, 즉 왜 출세를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완장촌'은 권력이나 출세의 속성에 대해 파악해 보

 

기 위해 제작진이 실험적으로 설치한 공간으로, 여기에 참여한 여덟 명의 남성은 서로의 나이나 이름을 모른 채

 

'1호', '5호' 등과 같이 기호로만 호칭해야 하며, 완장을 찬 이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규칙을 갖는다. 제

 

작진은 권력, 출세의 동기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기 위해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완장을 다른 이에게

 

부여해 주었고, 출연자들은 각자의 의도, 혹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완장의 모습을 보였다.

 

 

 

2부 '출세의 의미'에서는 궁벽한 시골임에도 정치인, 교수, 법조인 등의 인재들을 줄줄이 배출하였던 '야소골'

 

편을 풀어 설명하고, 특히 야소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야소골의 출세기는 산업화 시기

 

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야소골에서 나고 자란 1세대는 자식 중에 공부 잘 하는 아이를 골라 서울로 유학

 

을 보내어, 뼈빠지게 농사를 짓고 소꼴을 베어 먹여 후원을 하였다. 이들에게 자식의 성공은 곧 자신의 성공이기

 

도 하다. 서울로 올라간 2세대는, 물론 자신의 노력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 기반이 되어 주

 

었던 부모와 형제들의 희생을 잊을 수는 없다. 그의 성공은 그의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의식은 혈연, 학연, 지연

 

중심의 사고로 쉽게 연결되기도 한다.

 

왜 한국인은 이렇게까지 악착스럽게 출세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반영되

 

어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폐허가 된 국토에서 일시적으로 평등사회가 이루어졌는데, 이 때 교육열이 폭발했다.

 

즉, 똑똑한 놈이고 돈 있던 놈이고 다 폭탄 맞아 죽었으니, 빨리 공부해서 빨리 성공할 수록 더 성공할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온 군부독재 시기. 서슬 퍼런 권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문중이나 마을에 하나

 

쯤 권력에 줄이 닿는 이가 있다는 것이 마패와도 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OO마을의 자랑 XXX군 사법

 

고시 합격!'등의 플래카드 전통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본적으로 봉건 시대 영주들이 백성

 

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댓가로 외부위협으로부터의 방어 등의 형태로 '돌려주던' 것이었다. 즉, 일종의 거래 행위

 

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노블레스들은 무언가를 받은 기억이 없다.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자신의 노력

 

만으로 성취한 것이므로 그의 성공은 오로지 그의 것, 혹은 그의 집안의 것, 혹은 그의 마을의 것이다.

 

 

 

3부 '출세의 법칙'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출세의 스토리, 행동 규칙 등에 대해 조사하고, 이것의 역사적 변천

 

을 살핀다. 제작진이 조사한 전형적 '과거 출세'와 '현재 출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과거 출세

 현재 출세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랐다.

 남들이 인정하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간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가졌던 꿈을 이루었다.

 명문대(국내, 국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상사나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아부를 잘한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거나 능력 있는 집안의 배우자를 만난다.

 단체모임이나 조직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애인이나 배우자가 능력 있고 잘 생겼다.

 경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의 기세를 제압한다.

 인맥(도와주거나 이끌어주는 선배나 상사 등)이 좋다는 평을

 받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로부터도 얻어낼 언변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속한 조직을 잘 활용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이 주인인 조직의 2인자

 위치에 만족하며 산다.

 방송 등에 자주 출연하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배짱과 오기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확실히 남들에게 나눌 줄 안다.

 가능한 한 튀지 않으려 하고 대세에 따르는 편이다.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

 남의 지탄을 받거나 비난받을 짓을 하지 않는다.

 

 

 

유의할 것은 이것이 실제 출세의 유형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생각하는 출세란 무엇인가에 관한 조사

 

라는 것이다.

 

 

 

4부 '출세의 완성'에서는 실제로 출세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선정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옮긴다. 대상은 기업인

 

중 박용만 (주)두산 회장, 목민관 중 김문수 경기도지사, 정치인 중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주로 하여 약

 

20쪽씩을 할애하고, 2쪽에서 5쪽 가량의 열 명이 덧붙는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전 서울지검 특수부장 김우경, 전 대검 중수부장 심재륜, 전 초대 국정원장 이종찬, 국회의원 이인제, 소설가이

 

자 전 국회의원 김홍신, 이철용,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 박철언,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정형근, 전 문화관광부 차관 유진룡.

 

위의 인물 가운데에는 제작진이 생각하는 출세란 무엇인가, 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사례도 있었지만, 책의 말

 

미에 왜 이들을 선정했는지, 그리고 저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출세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발언하고 있으니 궁금

 

한 분들은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출세'라는 키워드로 읽어낸 한국 사회. 키워드의 선정도 프로그램의 접근 방식도, 재미있고 유효했다고 생각한

 

다. 다소 거친 부분도 적지 않지만 책상물림 학자의 원문과 주석 투성이 논문보다 훨씬 더 적실하게 현실을 반영

 

하고 있고, 또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본다. 출세하면 좋은 세상이 아니라, 출세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산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