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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봉규, <현판기행> (담앤북스. 2014,7.)

 

 

 

 

인문학 서적 필자인 김봉규의 2014년 작. 부제는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정갈하고 알기 쉬운 제목이 마음에 쏙 든다. 제목 그대로 전국의 현판을 찾아 그 모습을 소개하고 얽힌 이야기를 풀어주는 책이다.

 

책은 총 4부 35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 2부는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 3부는 사찰에 걸린 현판, 그리고 4부는 앞서의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가택, 대문의 현판을 소개한다.

 

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실제로 현판에 관한 대중서나 논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현판 자체도 물론이거니와 현판이 걸려있는 시설들이 현대인에게 친숙한 공간이 아니고, 세 글자, 많아봐야 네 글자로 이루어진 현판을 대상으로 한 편의 논문을 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발품을 팔아 나와준 이 책,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런 현실을 감안하여, 짧은 분량이나마 현판의 유래, 의미, 그리고 서체 등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언급해 준 점 또한 돋보이는 상냥함이다.

 

개별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책이 구성되다 보니 현판 글씨로 유명한 이들의 계보라든지 현판을 감상하는 구체적 기준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에는 다소간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나 아니면 인근 지역을 방문하기 전마다 틈틈이 다시 읽으면 언젠가는 내것으로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현판이 걸린 건물의 건축양식이나 현판이 쓰여진 당시의 뒷이야기 등이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짤막짤막하게 연결되어서 나는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다. 이런 이야기는 특히 '아는척 매뉴얼'로 써먹기에 유용하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임금인 선조는 도산서원에 대해 나라에서 편액을 내리기로 하고, 당대 최고 명필인 석봉 한호에게 편액 글씨를 쓰게 하기로 결정했다. 1575년 6월 어느 날, 선조는 석봉을 어전에 불러 편액 글씨를 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 알려 주지 않고 부르는 대로 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라고 하면, 젊은 석봉(당시 32세)이 퇴계와 도산서원의 명성이나 위세에 눌려 글쓰기를 양보하거나 마음이 흔들려 글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순서는 거꾸로 하기로 했다.
선조는 그에게 첫 글자로 집 ‘원院’자를 쓰라고 했다. 석봉은 ‘원’자를 썼다. 다음은 글 ‘서書’자를 쓰게 하고, 이어서 ‘산山’자를 쓰도록 했다. 석봉은 쓰라는 대로 여기까지는 잘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편액 글씨를 쓰는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았다. 바로 질그릇 ‘도陶’자다. 이 자를 말하면 석봉도 도산서원 편액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는 ‘도陶’자를 쓰라고 했고, 석봉은 그때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자를 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붓을 떨며 가까스로 ‘도’자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쓴 ‘도’자가 다른 세 자와 달리 약간 흔들린 흔적과 어색한 점이 있다고 전한다. (p122)

 

이 이야기는 사실 옛 문화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학문을 전공하는 연구자에게는 유명한, 일종의 야담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도산서원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뒷날 지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있거니와 정말 그런가, 하고 글자들을 세심히 살펴보는 재미도 생긴다. 이 책 한 권으로 도산서원 현판 앞에 서서 이런 이야기 하나쯤 날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쉽게 해먹는 아는 척이겠는가.   

 

이렇게 내용을 읽는 재미에다, 거의 매 장마다 건물과 현판의 사진이 컬러로 들어가 있어 눈 또한 호강하였다. 특히 현판 글씨는 대자(大字)로 쓰는 것이라 호방한 맛이 있어 몇차례고 다시 들여다보고 또 특히 매력적인 것은 따라 써보기도 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교양 삼아 읽어도 좋겠고, 국내 여행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한 권 마련해 두고 여기에서 소개하는 장소들을 차례로 방문하여도 좋겠다. 현판이 걸린 건물이란 대체로 인근 지역에서 이름난 명소이니까. 여러 사람에게 부러 추천하지는 않겠지만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책을 구하고 있다면 슬쩍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