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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우치다 타츠루, <혼자 못사는 것도 재주> (북뱅. 2014, 9.)

 

 

 

 

이 카테고리에는 <스승은 있다>로 소개하였던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9월 신작. 본래는 제목만 보고 1인 가정에 대한 내용일 것으로 오해를 하여, 우석훈 씨의 <솔로 계급의 경제학>과 엮어 독후감을 쓰려고 읽었던 책이다. 조금만 더 꼼꼼했더라면 표지 그림에서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들이 함께 살아남는 법'이라는 부제를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

 

책은 최근 몇 년 동안 번역되어 나오는 그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랑', 그리고 '약자 간의 연대'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가 직접 블로그에 올린 글 가운데 해당 주제에 속하면서 아울러 화제가 되었던 것들을 묶어 책으로 낸 것이라 한다.

 

'일', '공동체' 처럼 현대인이면 누구나 관련되어 있는 소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혹여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특유의 유머러스한 접근법으로 개성적인 사상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은 교토 여행을 다녀와서 쌓아두었던 일 때문에 정신없는 2014년 연말이다. 곁에 두고 몇 차례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긴 여행을 다녀와보니 어느덧 도서 반납 기한이 다가와서 급하게 쓰는 글이라, 일단 그 가운데 가장 즐겁게 읽었던 한 꼭지를 골라 옮겨 적어두는 것으로 독후감을 갈음하려 한다. 109쪽부터 116쪽까지 실려 있는 ''무인도 규칙'을 알고 있습니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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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RCUS>라는 잡지의 취재에 응했다. 주제는 '어째서 젊은이는 일을 잘할 수 없을까?...' 한쪽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노동하지 않는 젊은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과로로 쓰러질 것 같은 젊은이가 있다. 양쪽 모두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일까?

  확실히 '어째서 그럴까요?' 궁금할 만도 하다. 답변을 해보자.

  첫째는 일하는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하류지향>이라는 책에서 분석했듯, 노동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틀 안에서 파악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성과에 대해 '등가의' 보수가 '지체 없이' '특정인 앞으로' 지급될 것을 희망한다.

  학생들이 알고 있는 '일work'의 경험은 우선 수험 공부와 취직 활동 뿐인데, 그것은 실로 노력에 대한 보수(성적이나 합격 여부)가 (합격 발표, 내정 통지 날에) '지체 없이' 노력에 상응한 평가로 특정인 앞으로 전해지는 시스템이다. 앞에서도 기술했지만, '수험=취직 활동의 동기'와 '노동의 동기'는 별개의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활동을 동일한 동기를 통해 영위하려고 하다 보니 톱니바퀴가 어그러지는 것이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행위이며 노력의 성과가 정확하게 개인의 보수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수는 항상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

  개인적 노력에 대한 개인적 보수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개인적 노력은 집단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는 형태로 보답받는다. 그래서 더불어 노동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고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는' 마인드를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다.

  이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노동을 해온 사람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 함께 일하고 그 성과를 함께 나눈다.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집단에 속해 잇으면 제대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일한다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활동으로서는 소비라는 경험밖에 없고, '노력'에 대해서는 수험과 취업 준비라는 경험밖에 없는 젊은이들은 이런 이치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이 거둔 노력의 성과를 타인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니, 그건 내 몫이잖아?

  어허, 그게 아니라니까....

  오늘날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이라는 문학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스위스인 일가가 표류 끝에 도착한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 첫머리에 무인도에 닿은 뒤 해안에서 모두 어패류를 모아 부이야베스bouillabaisse(일종의 수프)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수프는 다 끓였지만 떠먹을 그릇이나 스푼도 없고, 양도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모두 작은 굴 껍데기를 돌려가며 수프를 떠먹는다. 그러자 어린애 한 명이 커다란 조개껍데기를 꺼내어 수프를 푹푹 떠먹기 시작했다. 참 요령 좋은 아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아이에게 묻는다. "넌 커다란 조개껍데기로 먹어야 수프를 더 효율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구나?" 아이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네, 맞아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왜 너는 가족 수대로 조개껍데기를 주워오지 않고 자기 것만 주워온 게냐? 너한테는 수프를 먹을 자격이 없다."

  나는 아홉 살 즈음에 이 에피소드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하, 그렇구나... 집단을 이루어 사는 데 '그런 룰'에 따르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구나 하고... 메모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 대다수는 이런 에피소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머리가 좀 이상한 게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경쟁적으로 분배할 경우에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는 게 왜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인가?

  이 룰을 받아들이면, 이를테면 주식 거래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맞다. 그렇다.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에 나오는 아버지의 룰에 따르면 주식은 거래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룰이란 '여러 명의 인간이 무인도에서도 살 수 있는'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점을 기억해두자.

  '무인도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룰이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예'일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특별한 예'밖에 알지 못한다.

  '개인적 노력의 성과는 개인이 점유해도 좋다'는 것은 생존경쟁이 거의 없는 시대, 자원의 분배 경쟁에서 패배하더라도 굶어죽지 않는 안전한 시대에만 적용할 수 있는 '특별한' 룰이다. 이른바 '온실 속의 룰'이다. 패자가 되어도 목숨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편안한' 사회에서만 '자기 이익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삶의 방식을 허용받을 수 있다.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는 노력의 성과를 점유해서는 안 되고, 늘 타자와 더불어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무인도의 룰'이 적용된다. 현대 일본처럼 안전하고 풍요로운 시대에도 친족의 구성, 커뮤니케이션, 교환처럼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본질적인 활동에서는 의연하게 인류학적 타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무인도의 룰'이 적용된다.

  자기 이익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온실 속의 룰'을 통해 성장한 아이들이 이익을 모두가 나누어갖고 위기는 모두 분담한다는 '무인도의 룰'이 적용되는 장소에 내던져질 때 무엇보다도 '일을 잘할 수 없다'는 현상에 당황하고 만다. 젊은이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보람'이라는 말도 '온실 속에서 성장'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들은 '보람이 있는 일'을 찾아 이리저리 직장을 옮기곤 한다.

  이때 그들은 '보람이 있는 일'이라는 말을 '수험 공부와 비슷한 일' 쯤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선택한 일을 통해 자기가 노력한 성과가 객관적 평가를 얻어 정해진 시간에 다름 아닌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런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보람'을 찾는 젊은이들이 결국 찾아내는 '보람 있는 일'이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 작가 같은 '자영업 크리에이터' 계열로 국한되고 만다.

  확실히 로큰롤 가수가 천만 인, 개그맨이 천만 인, 만화가가 천만 인인 사회가 되는 것도 신명나고 활기차겠지만, 사회적인 요구도 좀 생각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특히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 사이에 경계선을 확실히 그었으면(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정하게 성과를 평가할 수 없으니까) 하는 요청은 불가피하게 그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따름이다. 본인들은 그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원래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경계선을 억지로 그으려고 하면 일을 분할segment하고 단위module화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내 일을 다른 사람 일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식별 가능한 일이란, 그 일 자체가 지극히 균질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그때까지 나란히 서서 함께 '경단'을 만들던 것을 멈추고, "오늘부터 나는 떡만 빚을 테니까 너는 팥고물만 만들어"라는 식이 되면, 분명 '떡'의 생산고와 품질은 '나'의 성과로서 명확하게 외형으로 드러난다. '떡은 맛있지만 팥고물은 좀 맛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 대가로 '평생 떡만 계속 빚는' 주박에 걸리게 된다.

  공동 작업으로 어수선하게 진행하던 작업을 분담하여 경계선을 확실히 긋고 단위화하면, 당연히 그 일은 '단순노동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파견회사의 일은 언제나 교체 가능하도록 완벽하게 단위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 평가는 어떻든 객관적이 된다. A군은 동일한 단위의 일을 일주일에 끝낸다. B군은 2주일이 걸렸다. 그러면 A군과 B군의 단위 시간으로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

  공평한 평가 기준이다.

  하지만 공정한 평가 기준을 위해 '계량 가능'하도록 한 대가로서 그들의 일은 필연적으로 '균질'해지는 동시에 무한하게 빡빡해진다. 이런 이치대로 나간다면 A군이 일주일 걸린 단위의 일을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하루에 끝내버릴 때 단위 시간당 보수는 더욱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적정하게 성과를 평가받는 일을 찾는 젊은이들은 최종적으로 '오른쪽 물건을 왼쪽으로 옮기는 속도'를 경쟁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게 된다.

  바로 오늘날의 현실이 그러하다. 일의 단위화 때문에 1990년대 '아웃소싱'과 '비정규직 고용으로의 전환'은 비용을 삭감할 비책으로 왕성하게 퍼져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내 일'과 '옆사람의 일'이 확실하게 분리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100% 책임을 지는 대신 그 성과와 손실도 자신이 책임지는 '자립형stand alone'의 노동환경을 원하는 구직자들의 마인드와 꼭 맞아떨어졌다. 본인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가은데, 구직자가 '보람이 있는 일'로서 '단위화된 일'을 찾을수록, 그들을 부리는 임금은 저렴해진다. 고용자들은 이런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성과급으로의 전환'이나 '독립 사업부 체제'를 찾는 젊은이는 지금도 많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일을 타자로부터 분리시키고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 노동 영역을 확립하면 '일할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가로 같은 입장에 놓인 노동자와 연대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노동조건이 악화되며 노동의 동기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손에 넣는 것은 사실 '과로사할 자유'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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