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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새벽산책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에는 산이 한자락 있다. 이 땅 어딘들 야트막하니 산 한자락 없을까마는 내게

는 어쩐지 마음이 가는 산이라 생활의 한켠에 두고 가끔 찾는다. 이름은 대범하게 약산. 산중에

오도카니 있는 절은 약사사이다.


여덟에서 열하나까지, 사년동안을 간석동에서 살며 매해 소풍은 그 곳으로 갔지만 그래도 어린 나

에게 절은 과히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었다. 고목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벌떼에 혼비백산해 도

망간 것이 열번쯤 되고 소리지르고 놀다가 스님들한테 쥐어터진것이 뻥좀 쳐서 백번쯤 된다.


그렇게 잊고 살던 그 절에 다시 찾아가게 된 것은 온통 혼란스러웠던 열일곱의 봄이었다. 영 학교에

가기 싫어서 몇차례 땡땡이를 치던 와중에, 이왕 이럴거면 어디좀 가보자 싶어서 인천에 아는데를

몇군데 생각해 보다가 궁여지책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낮잠을 한 번 시원하게 잤다. 꽤 오래

잤다고 기억하는데, 그 와중에도 한 번 인기척에 깨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고서는 뉘엿

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서는 부처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던 것인데.


이후로 그곳은 나에게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일이 있거나 하면 찾아가 한참을

앉아 있다 오는 곳이 되었다. 나는 처녀자리에 B형답게, 혼자서 일처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속내를

보이기 싫어한다. 그러니 혼자 조용히 앉아 있으면 생각도 정리되고 결정도 내릴 수 있는 곳이라면

인생의 고비마다 찾아갈 수밖에. 열일곱에 자퇴를 생각했을 때, 열아홉에 첫사랑과 이별을 하던 때,

스무살에 재수를 결정하던 때, 스물 두살에 군대를 결심할 때에 (그렇다. 이 나에게도 군대를 결심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순간들의 바람과 습도, 부처님의 얼굴

에 떨어지던 석양까지 전부 기억한다.


근래 다시 서울에서의 생활에 너무 매달려 있는 것 같아, 혹 흐름안에 있기때문에 보지 못 하는

것은 없는가 싶어 잠시 강밖에 나가 보려고 새벽 한시가 넘어 슬금슬금 집을 나섰다. 걸어서도 사오

십분이면 충분한 거리. 안개가 두툼하니 겹쳐 차들도 지나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엔 참으로

좋았다. 일부러 씨디플레이어고 전화기고 다 놓고 나간 길이라 생각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스윽스윽 걸어서 도착한 약사사. 언제나처럼 부처님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자니, 달빛이 안개를

먹고 내리비추어 한편으로 처연하고 한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무섭지 않은 것은 도리어 신

기한 일이었다.


정말로 이것저것. 이것저것을 생각했는데, 일일이 적기는 뭐하고.


새벽에 정신을 놓고 앉아 있자면 가끔 스님이 부처님께 합장을 하러 불쑥 나타나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있다. 그런때에 스님들은 보통 슬쩍 웃어주거나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는데, 나는 오늘 태어나 처음으

로 스님의 웃는 얼굴에 마주 웃어주었다. 휘적휘적 돌아오며, 그것만은 오늘의 확실한 성과로 기억

해 두기로 했다.


이제 새벽 네시. 오야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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