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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The Dark Knight






(실제로 끝까지 읽은 것은 몇 권 되지 않지만) 코믹스까지 합해서, 배트맨에 관련된 작품 중에서는 팀

버튼의 'The Batman' 1편과 2편이 가장 훌륭했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The Bat

man begins'에 적잖이 실망한 바 있었다. 'Batman Forever'나 'Batman & Robin'등의 이전

영화작들에서 느꼈던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까지 기계적으로 더해져 그 영화에 관해 물어오는 지인

들에게 신랄한 혹평을 날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덕분에 미국에서 평론가들과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팔랑귀는 별로 움직이지 않

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영화관까지 간 가장 정확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시리즈의 팬이니 숙제하듯 DVD로나 챙겨봐야지,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여러가지 단점이 눈에 띄었다. 우선,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투페이스 허비 덴트의 감정

선은 동조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조커나 펭귄맨에 비해 투페이스의 트라우마와 캐릭터는 지나치

게 전형적이긴 하다. 팀 버튼이라면 오히려 더욱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살리고 넘어갔겠지만

'Memento'의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우리가 바라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실망이라기보다

는,조금 더 해 줄 수 있었잖아? 라는 아쉬움에 가깝다.)

비교적 효율적인 재조명에도 불구하고, '배트맨-고뇌'의 공식은 이미 너무 확고한 듯 하다. 전작에 비

해 수트에 좀 더 밀착하게 된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와 배트맨의 고뇌라는 테마를 간접적으로 조명

하기 위한 여러가지 주변적 장치들이 있었지만, 익숙한 것에서는 역시 감동을 느끼기가 어렵다.

여기서부터는 앞서에 비해 다소 개인적인 감상인데, 레이첼 역에 새로이 발탁된 매기 질렌홀의 얼

굴이 내내 거슬렸다. 무슨 연기를 하든지 비웃고 있는 듯이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눈 밑의 양

쪽 대각선 방향으로 기묘하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이 특히 그랬다. 비극적 운명을 가진 히로인이라는

복선인 것일까. 스파이더맨의 키어스틴 던스트 이후로, 이렇게나 매력 꽝인 히로인은 없었다.

매기 질렌홀의 외모야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일이라지만, 크리스천 베일의 발음에 대한 문제제

기는 보편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배트수트를 입을 때마다 어처구니 없이 낮아지는 목소

리를 백보 양보해 캐릭터 메이킹의 일환이라 이해하더라도, 입을 조그맣게 하고는 혀만 무쌍하게 놀

리며 웅얼웅얼거리는 발음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얼굴의 열을 식히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자신

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분명한 장점이 있는 영화였다. 우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조커 역의 히스 레저.

요절의 레전드가 덧씌워져 있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의 연기는 박수를 보낼만 했다. 이것이야

말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조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혀를 날름날

름. 텀블러나 배트포드 등을 마다하고 무려 20만원에 가까운 12인치 조커 피규어에 가장 눈독을 들이

게 되었을 정도.

전편에 이어 여전히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제임스 뉴튼 하워드와 한스 짐머의 음악, 음향도 장점으로

꼽을만 했다. 영화는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The Batman begins'의 OST 만큼은 밤을 새워 공부하

게 될 때마다 반드시 재생 목록에 올려 두었을 정도로 좋아했던 탓에 익숙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즐

거웠다. 한스 짐머야 'The Lion King'때부터 경배의 대상이지만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The Batman

begins' 에서의 작업 말고는 아는 바가 없어 이 기회에 검색을 해 보니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008년 작 'The Happening'의 음악감독을 맡은 경력이 있었다. 제발, 식스센스 때의 내 사랑을 되살

려 줘, 라고 주문을 외우다시피 하며 겨우 끝까지 보고는 바로 화일을 지웠던 그, 'The happening'

이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다른 음악들을 듣고 싶은 욕구는 맹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

화를 다시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게리 올드먼과 모건 프리먼의 연기에 더 이상 무슨 평을 덧붙이랴. 서 있기만 해도 빛이 난다. 아울

러,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오스틴 파워의 아버지 나이젤 파워이

신 마이클 케인의 알프레드 또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이런 장르의 백미로 꼽히는 자동차 추격씬을 장점으로 꼽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놀라는 일이다. 나

는 유난히 자동차 추격씬을 지루해 하는 탓에 긴 추격씬을 갖는 '나쁜 녀석들 2'나 '트랜스포머'등의

영화에서는 꾸벅꾸벅 졸았고, 한국 영화 추격씬의 신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범죄의 재구성'을 볼

때에는 딱히 갈 필요가 없었던 화장실에 갈 정도였었는데 'The Dark Knight'에서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대규모의 예산만 있다면 인간은 저런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자문을

몇 번이고 하게 만들었던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은 역시 앞서 꼽았던 여러 개의 단점을 덮고, 장점을 극단

화시킨 감독의 역량일 것이다. 작품의 전체 색을 결정짓고, 각본을 손 보고, 연기선을 제시하고, 음

악을 조절하고, 편집에 관여하여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이제

겨우 두 작품이지만, 그는 장구한 배트맨의 역사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리즈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는 평은 매트릭스에도 가열찬 숭배를 보내는 서양인들에게나 적합한 것이고,

올해 최고의 오락영화라는 평은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실망의 단초가 될 것이지

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총평하여, 괜찮은 영화였다. 아직 보지 않았고 시간이 되는 주위의 이라면,

보러 가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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