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여행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것이니 무엇보다 여행 관련 정보부터 먼저. 남한강자전거길에서 슬쩍 옆
으로 빠져 몽양기념관으로 올라가는 500m는 굉장한 업힐이다. 몽양을 만날 자 이 정도는 각오하라는 것일까.
아무튼 참고 바란다. 씩씩대며 올라가면 먼저 몽양 유객문이 방문자를 맞는다.
유객문(留客文)은 머무를 류 자, 손님 객 자, 글월 문 자의 글자 그대로 풀면 '손님을 머무르게 하는 글'이다. 그
러니까 '몽양 유객문'이라 하면 몽양이 손님을 머무르게 하려 쓴 글, 이라는 뜻이 되겠다.
몽양 유객문의 출전은 '주자 유객문'이다. 주자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그 주희 맞다. 주희는 귀한 손님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 그가 빨리 일어나지 않고 좀 더 머물렀다 가도록 일종의 퀴즈를 내었다 한다. 다음의 문장을 해석
할 수 있으면 가도 좋지만 만약 해석하지 못한다면 묵었다 가도록 하는 퀴즈였다. 한자로 쓰여진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人我人我不喜人我不人我不怒我人人我不人我人我不人人我人我不人欲知我人不人我人我不人人之人不人
고문 한문은 본래 띄어쓰기가 없다. 게다가 한 글자가 몇 개의 품사 역할을 하는 한자의 특성상 여기에서 끊어읽
어도 말이 되고 저기에서 끊어읽어도 말이 되는 통에 원래의 뜻을 알기 어려운 것이 한문 번역의 난점 중 하나이
다. 멀쩡한 문장이라도 그러한 어려움이 있는데 위의 문장처럼 너댓 개의 한자를 가지고 장난질을 쳐놓은 것이
라면 주희가 친구를 먹을 정도 되는 수준의 인물이라도 땀을 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못 풀고 주희와 하룻
밤을 보내며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이 '주자 유객문'에 얽힌 이야기이다.
몽양은 종종 이 '주자 유객문'을 인용했다고 한다. 손님을 묵었다 가게 하려는 본래의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문
장에 담긴 뜻 자체에 공명하여 그리했다는 설명이 <여운형 평전>에 전한다. 위 사진의 비석에 적힌 '몽양 유객
문'을 읽기 편하게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기뻐할 바 아니요,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내가 노여워할 바 아니니라.
내가 사람이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내가 사람이요,
내가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사람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고자 할진댄
나를 사람이다 아니다 하는 사람이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아보도록 하라.
사후에는 물론이거니와 생전에도 '인민의 벗'이라는 존칭과 함께 일각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라는
혹평까지 들어야 했던 몽양의 삶이 그 내용 안에 보이는 것 같다. 유객문을 지나 한 차례의 오르막을 더 오르면
몽양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차분한 외양의 기념관 건물 위쪽으로 생가로 추정되는 한옥 건물이 눈에 띈다. 주차장의 그늘을 찾아 자전거를
세워두고 일단 기념관에 먼저 들어가보기로 한다. 입장료는 천 원이다.
몽양의 친필과 유품들 사이로 관광객을 위한 몽양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위치와 자세가 설정샷을 부른다.
유혹을 피하지 못하고 설정샷의 늪에 빠졌다. 사진을 찍을 때엔 둘째 치고 기념관을 나올 때까지도 관람객은 나
뿐이었기 때문에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힘든 자세의 셀카를 찍었다.
조각상의 오똑한 콧날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남아있는 사진으로 접할 수 있는 몽양은 독립
운동가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이었다.
게다가 쾌남이기까지. 왕갑빠 덕분에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에 모델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척 동생들과 무술 수련 등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1933년이면 몽양이 쉰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그 때까지 몸매를 유지했다는 것이나, 신문사 사장이면서 모델에 나설 생각을 했다는 것이나 여러 모로
재미있는 인물이다.
사진 밑의 설명도 좀 읽어보자. '스포-쓰맨으로서의 여운형 선생의 최근 사진 (48세)'.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21
세기 여성들이 좋아하는 잔근육 예쁜이 몸은 아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두두룩 두두룩한 몸. 나도 좋아한다.
그의 마리오 콧수염 만큼이나 부럽다.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에 거의 마지막으로 전시된 물건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몽양은 본디 참여정부 중반기
인 2005년에 한차례 건국훈장에 추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 층의 반발을 예상한 보훈처는 1급인 대한민
국장이 아니라 2급에 해당하는 대통령장을 서훈하였다. 유족들은 즉각 반발하였고, 비록 2급이라도 몽양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려 한다는 소식에 보수언론의 반대 또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에 서훈을 보류하였던 참
여정부는 공식 임기 종료가 사흘 가량 남은 2008년 2월 21일, 위 사진에서 보듯 몽양에게 1급 건국훈장인 대
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 '기습적'인 시도에 분노하는 보수 논객들의 기사를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던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몽양과 합성사진을 찍을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여러 기념관에 가 봤
지만 이런 코너는 처음이라 재미있어하며 들어가봤다.
스크린 앞에 서면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내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이 모습이 원래의 사진에 합성되는 것이다.
배경으로 쓰이는 원본 사진은 10여 장 이상이다.
발 밑을 보면 버튼이 세 개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화살표를 통해 내 모습이 합성될 배경사진을 선택한 뒤
오른쪽의 빨간 버튼을 발로 누르면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된다.
촬영이 끝난 뒤 스튜디오를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프론트로 가면, 위에 보이는 계산기처럼 생긴 기계를 통해 방금
찍은 사진을 현상해 준다. 사진은 1인당 1매씩 현상할 수 있다 한다. 손님 없을 때 애교를 잘 부리면 한 장 더 현
상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안 된다면 천 원 내고 입장권을 한 장 더 사도 될 일이다.
나는 '1944년 가을 봉안논촌쳥년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슬쩍 끼어들었다. 택할 수 있는 배경사진은 여러 장이
있지만 사진 속의 인물들과 화면에 잡히는 내 몸 크기의 비율이 어울리는 사진은 몇 장 없다. 몽양의 왼편으로
멋들어진 헤어스타일의 영화배우 유해진 씨가 눈에 띈다.
사진이 출력되면 프론트의 아저씨가 뒷장에다가 몽양의 낙인과, 몽양의 사인을 새긴 도장의 낙인을 찍어준다.
필기체로 된 사인이 멋지다. 그러고 보니 몽양은 영어도 잘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몸짱에 영어도 잘 하고
마리오 콧수염까지. 배가 좀 아프다.
기념관의 한켠에는 올해 11월까지 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사진전의 부스가 있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한 번씩 보게 되는 조선건국동맹 깃발.
많은 사진이 있었지만 이곳에 전부 소개하지는 못하고,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였던 한 컷만을 골라 올린다. 19
29년과 1930년인 쇼와 4년, 쇼와 5년에 작성된 서대문형무소의 수형기록표. 신분은 양반, 본적은 경기, 거주
지는 지나支那 상해上海 등의 정보 등이 눈에 띈다. 서대문형무소는 매일같이 버스 타고 지나는 독립문역 인근에
있다. 80여년 전에 몽양이 바로 그 길을 걸어 구치소로 들어갔고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한층 더 와
닿는다. 이래서 현장교육을 시켜야 하나보다 싶다.
기념관 한켠에는 생가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밖에서 보았을 때 기념관 위쪽으로 생가가 얹혀있는
것처럼 보이던 비밀이 여기에 있었나보다.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생가의 마당이 펼쳐진
다.
마당에 세워진 비석과 그를 둘러싼 손판들. 무식이 부끄럽게도 대부분의 이름은 낯선 것들이다. 와중 함께 건준
을 세웠던 6촌 동생 여운혁 등의 이름이 간간이 눈에 띈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있다. 얼마 전 있었던 6대 지방선거의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야권 단
일화 후보 경선에서 패한 전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 씨의 손판.
힘없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언제나 가 계시는 함세웅 신부님. 귀엽고 소박한 필체가 눈에 띈다.
인적 하나 없는 생가에 들어가봤다. 좋은 데 사셨네, 하고 둘러보다가,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보이시는가? 사진 중앙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왼쪽 창 곁에 숨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저 시선.
은 다가가보니 면도를 하고 있는 몽양의 마네킹. 좀 잘 보이게 두든지 아니면 좀 어설프게 만들어서 멀리서 보
고도 마네킹인지 알게 하든지. 진짜 사람처럼 만들어서 사각에 숨겨 놓으니 나 같은 마음튼튼이도 놀랄 수밖에.
생전의 모습 중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많았겠지만 검소한 차림으로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는 인
간적으로 느껴져 참 좋았다. 올라가지 마시라는 안내판만 없었더라면 면도를 돕거나 아니면 몽양 할아버지의 무
릎을 베고 누운 설정샷이라도 찍고 싶을만큼 친근한 모습이었다. '인민의 벗'이라는 그의 애칭도 새삼 더욱 정겹
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가면 책장 구석에 박힌 여운형 평전을 다시 들춰 봐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앗차 나 저때 남한강자전거
길 타는 중이었지 지금은 남한강자전거길 일기 쓰는 중이었지 하고 자전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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