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전작 <그의 슬픔과 기쁨>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들었던 의문이다. 사람을 홀리고 울리는 이런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었던 최초의 질문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잘 듣고 잘 묻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요즘이라 더욱 궁금했다. 그 책에서는 작가가 시종일관 담담한 나레이터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봤다. 나레이터 뒤의 작가의 모습과 그가 가진 질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저작들. 인터뷰집과 여행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책이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고 또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부제가 마음을 움직여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책의 본문은 열네 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 꼭지 안에는 라디오 PD인 작가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며 들었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듣고 받은 느낌, 하게 된 생각들이 섞여 있다.
이 책에는 내가 심야 라디오, 현대시, 생활 에세이 등에 끝내 버텨내지 못했던 몇 가지의 특징이 아주 선연하게 살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갑작스럽고 빈번하게 인용되는 어떤 소설의 문구들. 그 소설이 어떤 소설이고 이 맥락에서는 왜 등장한 것인지 굳이 혹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는 태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비유적 표현들. 관찰의 대상이나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본인들도 의도하지 않았을, 지극히 세밀한 어떠한 특징을 잡아내어 관찰자이자 인터뷰어인 작가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몇 차례고 거듭하여 감상하는 모습. 삶에 편린적으로 녹아있는 철학성이나 비극성 등을 일부러 더 크게 인식하고 그 앞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슬픔을 즐기는 자세. 등등.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특성이 언제나 내 비위에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열댓 명이 만난 술자리의 2차나 3차 쯤에 가면, 1차에서는 그 말투나 인상이 낯설고 불편해 가까이 앉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차츰 재미있어지는 순간이 있다. 이야기가 많이 재미있다면 마침내 낯설고 불편했던 말투와 인상까지 좋아지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장면을 떠올렸다.
그냥 세상 사는 이야기인데 이 누나는 뭐 이런 데까지 생각을 하고 이런 느낌까지 받나. 그 삶 참 피곤하고나,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 누나는 그런 누난가보지 뭐, 하고 생각하게 되다가. 그러고 나니 누나가 들어온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지다가. 끝내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낸 이 누나, 정말 재미있는 누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부터 매일같이 몇 시간씩 만나 차를 마시며 알아나가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다음 번 술자리에 나올 때엔 이 누나 꼭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우박이 내리는 성남의 재래시장에서 작가는 떡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소하고 건강한 깨달음이 들은 작은 인생 이야기였다. 적당한 깨달음과 그만큼의 실망이 섞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작가에게, 떡집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일하는 것 가운데 좋은 점 하나는 '살아가는 것을 쉽게 해주진 않지만 살아가는 것을 더 괜찮게 여기게 해주는' 멘토를 만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당장 떡집 아주머니의 멘토인 야채집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야채집 아주머니는 부끄러워하다가 자신이 우울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결 방법은 세 가지였다. 일기를 쓰는 것.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어주던 동화책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것. 그리고 천 원짜리 플라스틱 컵에 무언가를 마시는 것.
일기를 쓰는 것이나 동화책을 읽어보는 것 등은 에세이 류에서 접할 수 있는 전형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천 원짜리 플라스틱 컵 이야기는 좀 달랐다. 그 컵은 아주머니의 집 2층에 세 살던 사람이 이사 나가면서 좋은 집주인 만나 편하게 지내다 간다고 선물한 것이라 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준 컵에 커피가 됐든 차가 됐든 하루에 5분에서 10분 정도 무언가를 따라 마시면서 베란다 밖의 나무를 보았다 한다.
문체는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았고 열네 편의 꼭지도 모두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슬프고 우울해져 있을 때, 그를 좋아하고 그의 슬픔을 걱정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다면, 값이 싸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더라도 볼 때마다 그런 사실을 되새길 수 있는 선물을 해야겠다는, 귀중한 한 생각을 했다. 그 술자리, 나가길 잘 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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