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 카테고리에 올리기 위해 독후감을 쓸 때에는,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가'라는
고민을 갖는다.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다 하더라도 공부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정리해
두는 학생으로서의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서의 과정에서 느꼈던 감흥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싶어하는
독자로서의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다 하더라도, 내 독후감에 감흥을 받아 그 책을 구해 읽고 또 언젠가는
그 책에 대해 개인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는 동지(同志)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런 많은 종류의 책들
을 읽는구나라고 찬탄해 줄 관객을 위해서인가. 글을 쓰는 '자세', 혹은 '위치'에 대한 생각이 끝내 확립되지 못
한 채로 마치는 독후감은 대개 다시 읽어봐도 조잡할 때가 많다.
오늘 쓸 독후감은 철저히 학생이자 시민인 나를 위한 글이다. 읽는 분들을 위한 배려는 적을 것이나 나 자신으로
는 이때까지 썼던 어떤 독후감보다 더 많이 고쳐 읽게 될 글일 것이다. 독후감의 대상이 되는 책은 최장집 교수
와 그의 제자, 후배, 동지들의 논문을 묶은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여러 학자들의 논문집이라고는 하지만, 총 4부 10장 가운데 서언 격인 1부와 결론 격인 4부를 포함해 3부 6장이
최장집의 논문이고, 다른 네 명의 학자들은 3부에 한 장씩을 기고하였다. 최장집의 논문이 실린 '부'가 '한국 민
주주의의 기원과 특징', '민주주의를 둘러싼 갈등들'과 같이 명징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반면 다른 학자들의 논
문을 모은 3부의 제목이 '우리는 한국 정치의 문제를 어떻게 보나'와 같이 범박한 것만 보아도, 이 책의 구심점
이 최장집의 논의에 놓여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한층 더 시의성을 갖게 됐다. 대선 후 미국으로 떠났던 안철수 전 후보는 귀국하는 비행
기에서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읽었노라고 밝힘으로써 그가 펼칠 정치적 행보의 성
격을 암시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4월 재보선을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안철수 의원은 수 차례 직접 최 교
수를 찾아 자신의 정치적 활동의 일익을 담당해줄 것을 간청하였고, 5월 말 출범한 싱크탱크 '정책네트워크 내
일'의 이사장 직을 의뢰하였다.
최장집 교수는 이사장 직을 수락하였다. '정책네트워크 내일'은 기본적으로 싱크탱크이지만 언젠가는 창당될 안
철수 신당의 구성에 핵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 예측되는 조직이었고, 그런 중요한 조직의 이사장 자리에
최 교수를 모시기 위해 안철수 의원이 '십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다고도 알려진 터라, 이사장 취임 후에 이루어
질 그의 발언은 정치권 초미의 관심사인 안철수 신당의 향방을 점칠 수 있는 풍향계와 같았다.
당연히 언론의 관심이 비상하게 모였다. 최 이사장은 5월 말의 한 강연회에서 안철수 신당은 노동 문제 중심의
진보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6월 초에 이루어진 한 세미나에서는 안철수 의원을 언급하지는 않았
지만 '중하층 소외계층의 사회경제적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제'라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전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이루어진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자 더 크게는 그의 학문적 이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철수 의원은 개별 정책 단위에 집중할 것이며 진보냐 보수냐의 이념 성향을 확립하는 것에
는 주안점이 있지 않다고 완곡하게 선을 그었고, 특히 6월 초 세미나에서의 최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노동
문제 등을 잘 대변해야 한다는 데는 생각이 같지만, 진보 정당은 아니다'라고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였
다. 해당 세미나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대선 후보였을 당시 그의 국정자문위원으로 참가한 바 있었던 표학길 서
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안철수 현상을 편향된 진보의 시각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
판하기도 했다. 이 독후감을 쓰고 있는 날은 해당 세미나가 이루어진 2013년 6월 3일로부터 4일 뒤인 6월 7일
인데, 이 '논쟁'은 그 이후로 정리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정책 연구 조직의 수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직간접적
으로 현 정국의 가장 큰 파랑 중 하나에 발을 담근 최 이사장에게 최초로 닥친 현실적 난관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때에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과거의 연구 이력일 것이다. 이 책 <논쟁으로서의 민
주주의>에 실린 최장집의 6편의 논문들은 2006년에 쓰여진 한 편을 제외하고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최
근에 쓰여진 것들이다. 그 가운데에는 전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과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것
도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최장집', 혹은 '(현재의 최장집이 아니더라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을 읽은 안철수가 기대한 모습의) 최장집'을 파악할 수 있는, 유효한 자료라는 것이다.
논문 가운데에는 4.19와 한국 민주주의를 논한 것처럼, 자체로는 대단히 의미 있으나 현재의 정국과 관련해 논
의하려면 깊은 분석을 요하는 것도 있다. 가치있는 일이겠지만 당장의 시간과 능력이 닿지 않는 일이라 그런 것
들은 일단 접어두고, 내용 중 특히 현재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분을 발췌하여 싣기로 한다. 독자에게는
재미가 없을 것이며 내게는 수 차례 다시 읽어야 할 독후감이 될 것이라던 선언은 이 때문이다. 이 뒤로는 길든
말든 필요한만큼 본문을 발췌해 둘 것이고, 이후로 그의 정치적 언행들이 언론을 통해 전해질 때마다 학자로서
의 입장이 관철되고 있는지,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지 등을 예측해 보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 언젠가 등장할 안
철수 신당의 당헌에 그의 정치적 이상향이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가늠하려 할 때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밝힌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분이라면 똑같은 목적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이라면 이
쯤 읽으셔도 좋고, 아니면 책을 구해서 전문을 읽어 보셔도 좋겠다.
1. '진영'의 문제 (p 123 - 126)
...한국 사회의 정치적 대표 체계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균열 간의 괴리는 점점 심화되어 왔고, 그 결과 정당들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좌, 우나 보수, 진보 뭐라고 부르든, 그간 그런 구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친북이냐 반북이냐, "빨갱이"냐 "수구 꼴통"이냐, 친노냐 반노냐와 같이 역사적이고 정서적인 태도를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든 이 구분은 그동안 갈등하는 두 세력의 안과 밖 모두에서 강한 적대 의식을 동반하며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기준에 있어서 두 세력 간의 유사성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정서적 차이만 과도하게 부각되는 일이 계속되었다. 앞에서 용산 사태와 세종시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두 이슈 모두에서 진보, 보수 정부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산 참사에서 보듯 강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진보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보수적이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중략)
필자가 보기에, 각 진영의 성원들은 그저 말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보여 주기로 되어 있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정치가 연기 내지 퍼포먼스 하듯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용산 참사에서는 분노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분노하고, 세종시 문제에서 수정안을 반대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하지만, 정작 재벌 건설 기업의 이익과 거대 개발 프로젝트 위주의 국가정책 사이의 오래된 결착 구조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식의 진영 구분을 편의적으로 지위재positional goods로서의 보수와 지위재로서의 진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각자의 진영 논리를 익히고 말하는 것이 공적 토론을 풍부하게 하는 데 유익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이나 보수적 지식인으로서의 위신과 지위를 갖게 만드는 그들만의 담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략)
즉, 보수, 진보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차이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경쟁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정치의 언어만 격렬할 뿐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실제 보수, 진보 사이의 경쟁에서 성장 지상주의를 넘어 고용, 분배, 노동, 교육, 사회보장 등 자율적 시장경제가 다루기 어려운 영역에서 대안의 개척 가능성은 광범하게 열려 있다.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새로운 경제 이념을 수용하고 거기에 사회적 시장 원리를 접맥하면서 정책 방향을 유연화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은 예상과 달리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지금까지 기존의 지위적 보수, 진보의 대결은 분단과 전쟁의 경험을 끊임없이 불러들이면서 강한 적대 의식을 동반하는 민족문제를 중심축으로 했기 때문에 경직되고 격렬한 반면 실제 사회 구성원을 통합하는 기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 영역에서 중앙과 좌에 걸쳐 넓게 열려 있는 영역의 이슈가 정치에 들어온다면 사회 통합과 합의의 기반은 확대될 것이다.
2. '정당'의 역할과 '반정당관'의 패러독스 (p 147 - 149)
...정당은 개인의 생활 영역과 국가를 연결, 매개하는 중심적 정치기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정당은 시민사회에서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조직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정치 생활의 공간을 열어 줄 뿐만 아니라, 국가 영역에서 통치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대안 정부alternative government로서의 역할을 한다. 요컨대 그 정치 에너지와 권력이 사회의 저변에서 창출되고 발원한다는 점에서 정당을 민주주의의 중심 제도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진보적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어떤 공동체적 가치와 목적을 상정하고 그로부터 행위의 정당성을 도출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공익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그것이 대중의 정치 참여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 혹은 이론적 논증을 통해 사전에 결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진보는 옳다"는 이들의 주장이 가능했던 것 역시 진보를 현실과는 관계없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교조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통 시민들이 체제의 중심적 행위자이자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와 그동안 진보적 지식인들이 운동 과정을 통해 발전시켰던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며 양자 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다.
(중략)
(일반 시민들이 체험하고 사는 실제 생활 영역의) 이익, 이익집단, 갈등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고, 보통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정치가 발생하는 그 지점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채널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정치와 정당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이런 정치가 발생하는 최초의 지점이자 풀뿌리, 그 원천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반정치주의, 반정당관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중략)
오늘날 민주주의가 서있는 사회적, 도덕적 조건은 가치의 다원성, 진리의 다원성과 이들 간의 충돌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 하나의 가치,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이론이나 사회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란 다원적 가치와 이익이 모두에게 평등한 절차와 제도라는 틀을 통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이 실질적 정당성보다 우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발전시킨 변혁적 민주주의관에서 대중적 참여의 중심적 채널로서 정당이 기능할 수 있는 공간은 아주 협소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익 갈등이 분출하고 권력이 충돌하는 사회 저변으로부터 합의를 도출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런 민주주의관에서는 정당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어 위로부터의 정치권력에 힘입은 개혁을 선호하기 쉽고, 그에 따라 지식인 엘리트들의 참여와 정책 투입 역할이 과도하게 커질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이것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일거의 결정이 국가권력과 관료 기구를 통해 사회 전체에 집행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중심 매커니즘은 정당이다. 따라서 정당 없이 또는 정당 밖에서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발전은 정당 발전의 함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좋은 정당정부를 준비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 (p 348 - 349)
첫째, 의제설정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 정당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당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야당이 특히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정부가 될 것인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경제 운용에 대한 대안을 갖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야당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여야 간 정치경쟁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치와 열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타협이 어려워 대결의 정치를 불러오는 민족문제 내지 이념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부터, 협상과 타협이 가능한 부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문제로 갈등 축을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집권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투입과 산출 측면에서 각각 당의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누구를 대표하나? 민주당이 허약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다. 당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경제적 힘이 당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해 당사자 집단의 참여를 가능케 하는 투입 측면이 강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직능 대표 채널을 확대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당의 산출 측면의 능력이 또한 제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당의 선출직 대표와 비선출직 전문가 그룹이 함께 정책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실력을 조직화하고 집단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당 리더십과 대선 후보 선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그동안 권력의 분산을 통해 당의 중심성과 리더십의 해체를 목표로 한 제도 개혁을 추진해 왔다. 일종의 자해적 정당 개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정당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이 약해지면, 정치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의 참여와 대표성이 약해진다. 그리고 이에 따라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힘도 약해진다. 당 대표를 중심으로 일할 수 있는 정당 조직으로의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모바일 투표를 포함해 완전 개방형 경선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맹목적 주장들에 대해서도 견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금도 약해서 문제인 정당의 정체성과 리더십을 더욱 해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모바일 기제에 친숙한 그룹이 과대 대표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이 대표하고 뿌리를 내려야 할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중산층과 서민 내지 소외 계층과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4. 정당이 중심되는 책임 정부를 위해 대통령과 정당이 해야 할 일 (p 356 - 358)
그렇다면 정당이 중심이 되는 책임 정부를 실천하기 위해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 정부를 구성할 때부터 정다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용하는 책임 내각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무총리와 내각 인사를 당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거나 집권당의 주도권 속에서 선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당정 협의는 단순히 당정 간에 의사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의 구성과 운용을 담보하는 기본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을 대표하는 내각은, 특정 정책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서 선거 공약을 이행할 정책 수행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대통령과 더불어 당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정당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정당은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일반 당원의 참여를 확장하고 신규 당원을 늘리면서 지역적, 계층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고, 수많은 정당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익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면서 그들이 정치 경력을 일궈 갈 수 있는 직업 훈련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의 정당 발전은 '대표'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동안 정당들은 여성, 노동, 청년, 시민운동 대표를 개별적으로 배려하는, 일종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대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대표를 뽑았다는 것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정당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회계층이나 집단, 기억, 기능적 분야에 속한 사회집단과 실제로 연계되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당이 바로 설 때 당 밖의 관료나 정치 지망생들 역시 신념은 제쳐 둔 채 이쪽저쪽 눈치 보고 줄서기를 하며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정당 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과업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변화가 연쇄적으로 전개된다면, 대통령은 쇼윈도식의 거대 프로젝트를 졸속으로 추진할 필요도 없고,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당 간의 경쟁 역시 상대를 모욕하고 상처를 주는 데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책 대안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당을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이다. 대통령 개인의 사인화된 정부가 아니라 정당의 정부를 만드는 일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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