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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2

깨달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읽어야 할 책이 있어 학교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나 검색을 해 보니 대출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집에서 도서

 

관까지는 걸어서 십여 분 거리이고 원하는 책이 꽂혀있는 데까지 가는 데에는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면 충분

 

하지만, 인기있는 책의 경우에는 그 사이의 시간에 대출되어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얼른 주섬주섬 옷을 입고

 

도서관 입장과 도서 대출을 위해 학생증을 챙긴 뒤 나는 총총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 도착해 출입 기계에 학생증을 대었는데 뿌-, 하는 소리가 났다. 파란 시그널에 삑, 하는 단음이면 통과,

 

붉은 시그널에 뿌-, 하는 장음이면 통과가 아니다. 학생증 단면에 기스가 날까봐 씌워 놓은 카드 덮개 때문일까

 

싶어 그것을 벗기고 다시 대 보았지만 역시 뿌-, 옆 기계로 가서 대 보아도 뿌-였다. 기계는 이래서 안 돼, 하고

 

한숨을 쉬다가 문득 보니 손에 든 것은 학생증이 아니라 색깔이 비슷한 씨티은행 현금카드였다.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이지 싫어서 못 견뎌하는 일 중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최악은 나 자신의 실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경우이다. 걸으면 건강에 좋아, 1km를 걸을 때마다 십만 원씩 나오는 직업이

 

있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걸어 집까갔다. 이제 학생증을 찾아봐야지, 학생증은 어디에

 

있지, 학생증은 항상 가방에 넣어두지, 가방은 어디 두었지, 하는 생각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사십여 분

 

전 집을 나설 때부터 가방은 내내 내 등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씨티은행 카드로 도서관 출입을 하려

 

했을 때에도, 학생증이 아닌 것을 알고 학생증을 찾으러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에도, 걸으면 건강에 좋다

 

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학생증은 등 뒤에 매달려 있었던 셈이다.

 

 

 

나 원 참, 하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씨티은행 카드를 책상에 내려놓고 학생증을 챙겨서 주머니에 넣은

 

뒤 집을 나서면서, 나는 육 년 전의 인도 여행에서 스스로 가장 뿌듯해했던 순간 중 하나를 떠올렸다.

 

 

 

볼 것 많은 여행이라도 항상 충분한 숙면이 우선이라는 것이 내 여행관의 일 번이지만, 갠지스 강변에서 열흘여

 

를 머물고 다음 도시로 떠날 것을 기약하면서는 그래도 한 번은 갠지스의 일출을 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마지막 날의 아침, 별을 보며 일어나 옷을 입고 강변에 나가 보니 어느새 해의 윗부분이 엄지손톱처

 

럼 올라와 있었다. 머무는 기간 내내 쳐다 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발을 닦기도 해서 이미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출을 머금은 갠지스의 모습은 화장터의 불이 일렁일렁하는 밤의 광경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데가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해를 쳐다보며 강변을 따라 걷다가 나는 길

 

가의 맨홀 구멍에 빠졌다.

 

 

 

변명을 하자면, 갠지스 강변의 바라나시라는 도시는 사천 년에서 오천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도시의 배치나 시

 

설 등이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 년 전의 것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수 시설도 그 중의 하나

 

로, 하수도는 길 아래로 넓고 깊게 뚫린 통로이고, 편의상 맨홀 구멍이라고 한 것도 실은 강변의 길에 쭉 깔려 있

 

는 너럭바위들 중 하나를 들어올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것처럼 둥근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면

 

굳이 그 쪽을 주목하지 않고 있었어도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알아채거나 피했겠지만, 설마하니 쭉 이어진 바

 

위길 중 바위 하나가 빠져 있고 그 구멍 아래로 천연의 하수도가 지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떨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옆으로 벌린 팔이 구멍의 양쪽에 걸리는 덕에,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떨어뜨리고 엉금엉

 

금 기어나올 수 있었다. 황망히 방으로 돌아와 보니 떨어질 때 긁힌 엉치 근처에는 피가 흐르지 않고 방울져 맺

 

혀 있었고 그 사이로 고급 쇠고기처럼 흰 마블링들이 죽죽 드러나 있었다. 그날 오후부터 긴 기차여행이 예정되

 

어 있었고, 도 아침에는 안 일어나다가 마지막 날 굳이 일어나서 이 꼴을 당한 것이니, 내 본래의 성정대로

 

라면 스스로에게 쉽게 식지 않을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날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왜

 

냐하면, 구멍에 떨어지고 기어올라오고 상처를 돌보는 내내 내 안에서 솟았던 생각은, '왜 지랄맞게 방정을 떨어

 

서 이 꼴을 당하나'가 아니라 '이 정도라 다행이다'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이, 내 생애에서 '여유'에 대해 참되게 느낀 첫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화를 낼 거리가 한두 가지

 

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리나 부당함에 분노를 하는 것보다는 남은 것,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야말로 부지불식 간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만으로도, 인도 여행은 인생의 중요한 경험 중 하나였다

 

고 할 수 있다. 학생증 사건이야 그때에 비하면야 큰 사고도 아니고 별 것 없는 수고로움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

 

멍청함 때문에 같은 길을 두 번이나 오가게 된 때에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혼자서 소리내어 한 번

 

웃고 마는 그 모습이 스스로 기특했던 것이다. 마음에는 아직도 갠지스가 흐르는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을 다시 찾아 기계에 카드를 댔는데 다시 붉은 시그널과 함께 뿌-, 소리가 났다. 입을 쩍

 

벌리고 어찌된 일인가 살펴보니, 집으로 돌아갔을 때 씨티은행 카드인 줄 알고 책상에 두고 온 것이 학생증, 학

 

생증인 줄 알고 주머니에 잘 챙겨온 것이 씨티은행 카드였다. 나는 여유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날은 더

 

이상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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