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1.26 정경섭, <민중의 집>
  2. 2012.12.03 신터 클라스와 피트
  3. 2012.10.18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독서일지2013.01.26 05:44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알맹이다!'였다. 마침 직전에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

 

라>를 끙끙거리며 읽고 난 뒤, 뭘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마음에 있던 터에 직격탄을 맞은 셈이

 

다. 마포 민중의 집 대표인 정경섭 씨의 2012년 8월 작이다.

 

 

 

 

수 년 전, 민중의 집 설립에 관한 기사를 접했을 때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불온한 일탈을 저지를 때 드는 쾌감의

 

한 종류였다. 내가 처음 접한 '민중의 집'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돈 까밀로' 시리즈에서 공

 

주의자인 빼뽀네와 그 일당들의 소굴을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읽었던 번역본에서는 민중의 집

 

도 아니고 인민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실제의 내용은 문화, 인문강좌나 동아리 활동 등 지역공동체에 가까웠다. 몇 년 후의 내가 무척이나

 

갈망하게 될 그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거악에 맞서 촛불을 가능한 높이 쳐드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 외에는 여

 

력이 없었다. '쫄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지난 18대 대선 이전부터도 다소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깊게는 아니더라도, 관심을 갖고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대통령이 체제에 미치는 영

 

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말 '일 잘 하는' 대통령이 당선된다 하더라도 많은 이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의 체제 변화는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는 판에, 정작 현실에서 내 손에 떨어진 것은 '사람

 

좋은' 후보였다. 비극적 결말의 호인을 보내는 상처는 한 차례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좀 더 관심이 많아졌다. 일차적으로는 사회과학 서적의 독서와 뉴스의 탐독

 

시간이 부쩍 늘었고, 전공의 공부와 사회 활동의 접점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비록 준비의 미숙으로 실패로 돌아

 

갔지만, 이 홈페이지에 몇 차례 소개한 적이 있었던 기타 선생님과 일종의 소규모 인문학 콘서트를 기획하였던

 

것도 후자의 연장선 상에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을 접하게 됐다. 열 시간이 넘게 앉은뱅이 책상에서 논문 준비를 하다 보면 허리와 목이 아

 

파 요즘의 독서는 침대 위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데, 책장을 넘기다 말고 벌떡 일어나 정좌를 하고 앉아 읽었다.

 

독후감에 점잖게 끼워넣기 위해 몇 줄을 인용해 끄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면지 몇 장을 쌓아두고는 혹시 날아

 

가 버릴까 두려워 독서 중간중간의 단상들을 날림 글씨로 휘갈기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래서, 마지

 

막 장을 덮고 나서 '알맹이다!'라고 되뇌었던 것이다.

 

 

 

 

 

 

저자는 2010년, 자신에게 민중의 집 설립을 꿈꾸게 해 주었던 유럽의 민중의 집으로 40여일 간 탐방을 떠났다.

 

길지 않은 이 기간 동안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스웨덴의 세 나라를 방문해 각국의 민중의 집의 연혁과 실태

 

를 조사하여, 그 내용을 작년인 2012년 8월에 정리해 출간했다.

 

 

 

 

유럽의 민중의 집은 그런 이름이 쓰여진 건물의 호칭이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지역의 최전선에서 펼치

 

는 공동체 활동이었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토론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은 구성원들에게 생존이 아닌 생

 

의 터전이었다. 어떤 이에게 민중의 집은 탁구장이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댄스 홀, 어떤 이에게는 놀이공

 

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여가를 보내고 문화를 접하고 교제를 하였다.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

 

적인 성향은 짙어지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했지만, 생활과 문화의 터전이라는 기본 모토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초반 부분에서부터, 이런 곳이 있다면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 하

 

고 마구 메모를 하며 읽었는데, 뒷부분을 읽어보니 그 대부분은 이미 유럽의 민중의 집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됐다. 탁구장, 댄스강습 같은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다 치지만, 일인 가구를 위한 밥집,

 

소규모 야시장과 놀이공원, 영화 제작소, 지역의 연극 축제가 계속 상연되는 연극 전용 극장 등이 이미 길게는

 

수십 년 전부터 민중의 집 안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훌륭하게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영화 제작 같은 것은 우석훈 씨가 학교 교육의 개선 방안으로 제안했던 것 중 하나인데, 성적 최하위의 학생들에

 

게 카메라를 쥐어 주고 단편 영화 하나만 찍어보게 해도 그들의 삶과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그

 

의견에, 아, 참 기발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따져 보기는 어렵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유럽의 민중의

 

집에는 이런 시설이 이미 구비되어 있고, 지도해 줄 수 있는 자원 강사도 있으며, 만들어진 결과물을 상연할 수

 

있는 극장도 있었다. 영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10대 시절의 나라도, 아마 이런 시설이 있었다면 완성도에 관

 

계 없이 한 편 쯤은 찍어보았을 것이다.

 

 

 

 

놀이공원도 있고, 바도 있고, 야시장도 있고. 요가에 일렉트릭 기타에 컴퓨터 강좌까지. 그 연혁이 몇십 년에 이

 

른다지만, 이런 건 어떻게 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 하며 읽다가, 스웨덴 편에서 의문이 풀렸다. 스웨덴 민중의

 

집은 원활한 운영을 위해 몇 개의 자회사를 두었는데, 그 중에는 '민중공원 소프트웨어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민중의 집에서 행하는 문화 행사와 관련 상품의 개발만을 '사업'으로 삼는, '회사'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올지,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지를, '돈 받고' 연구하는 '기업'이 있는

 

것이다. 정치활동이나 사회활동 하던 사람 몇이 모여 앉아서 어떤 일을 벌리면 사람들이 좀 찾아올까, 하고 브레

 

인스토밍 몇 번 하는 수준이 아니다.

 

 

 

 

필요한 것을 갖추어 놓고, 모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유럽 민중의 집은 가장 큰 강점 중의 하

 

나인 '접근성'을 획득했다. 책을 읽으며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민중의 집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처음 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부모님과 친구들을 따라왔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건 거기에 계속 있

 

었고, 내 부모와 친구들이, 그러니까 나에게 중요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행복하게 잘 논다. 그러면

 

나도 거기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처음에야 단순한 사교의 장이지만, 공간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연스레 거기

 

에서 행해지는 보다 고급한 행위들에도 차차 도전할 수 있게 된다. 부럽다, 부럽다 하고 위에 써 놓았지만, 사실

 

한겨레 문화센터나 구청의 문화강좌를 탈탈 뒤져보면 웬만한 수업은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생 처음 가 보는

 

동네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 가며 무언가를 배우거나 직접 하는 것과, 어릴 때부터 드나들던 곳에서 대부분 아

 

는 사람들과 함께 배우거나 무언가를 직접 하는 것의 심리적 장벽의 차이는 과연 얼만큼일까. 스웨덴 민중의 집

 

은 심지어 선거 기간에는 투표소로도 쓰인다. 정말로, 사람답게 사는 삶의 거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우리나라 민중의 집은 현재 네 곳에 있다. 이후에 생겨날 민중의 집에는 지역적인 특성을 반영해 보면 어떨까 싶

 

다. 예를 들어, 임야에 인접한 민중의 집에서는 대규모 영농이나 화훼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노량진에

 

민중의 집이 세워진다면, 재수생과 고시생을 상대로 한 식사 기능이 극대화될텐데, 소규모 농가와 바로 연계하

 

면 의의도 있고 사업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강좌를 통해 대학생과 공무원이 될 이들의 문화 소양을 키워

 

줄 수 있다면 이중의 소득이 될 것이다. 공업 지구 같은 경우는 타 지역에서 일하러 온 일인 가구가 많은데, 이들

 

을 위해 민중의 집 내에 고양이 사육 코너가 있으면 어떨까. 동물과의 교류가 우울증이나 향수를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인근이라면 양심적인 가격의 하숙집을 소개하거나 자원 봉사자들을 통한 무료 이사 서비스 등이

 

젊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데 유효할 것이다. 30대 직장인들이 많이 오가는 지역의 민중의 집이라면 결혼 과정

 

과 결혼식에 대한 컨설팅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믿을만한 소규모 금은방을 연계해 준다든지, 사진과의 학생들,

 

혹은 민중의 집 사진 강좌 수강생들과 연계해 무료로 웨딩 사진을 찍어준다든지 하면, 성황을 이룰 것이라고 장

 

담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 다음부터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정운 교수의 말 중에, 우리나라 남자들을 모두 평일 다섯 시에 퇴근시키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

 

라 이혼율이 올라갈 거라는 언급을 음음, 하고 고개를 끄떡거리며 읽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주 5일제가 시행된

 

뒤 이혼율이 올라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린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해 왔기 때문이다. 생존

 

이외에 하는 일이란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것으로, 그 또한 다시 생존을 하기 위해 충전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족과 같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주말에 빈 사무실에 나와 인터넷을 하거나, 아니면

 

싸우고 헤어지거나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최고의 구호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지만, 막상 저녁을 돌려주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노력해서, 조금씩의 성과들이 사회의 저변에서 들려

 

온다. 민중의 집도 그 중 하나이다.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해, 일독을 강권한다.

 

 

 

 

 

 

 

Posted by 최대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기장/20122012.12.03 20:55

 

 

 

 

 

 

크리스마스 트리를 다시 꺼내면서, 작년에 했던 장식을 그대로 다는 것이 재미없게 느껴져 트리 밑에 놓을 그림

 

한 점을 그려봤다. 메인 모델은 만화가 정철연 씨의 유명 웹툰 <마조&새디>의 주인공 마조와 새디. 한 장만 그렸

 

고 가정에만 전시하는 등 상업적인 목적은 전혀 없으니 도용을 알게 되어도 용서해 주셨으면 한다.

 

 

 

 

 

오른쪽의 새디가 입고 있는 것은 '신터 클라스(Sinter Klaas)'의 의상이다. 신터 클라스는 발음의 유사성에도 보

 

이듯이 산타 클로스와 마찬가지로 성 니콜라스(St. Nicholas)로부터 발원된 캐릭터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

 

리고 네덜란드 령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산타 클로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뉴암스테르담, 지

 

금의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청교도들이 신터 클라스 캐릭터를 전파하였고 이것이 미국식으로 발음되면

 

서 산타 클로스로 바뀌었다고도 하니, 실제로는 같은 인물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겠다. 빨간 옷을 입고 겨울에

 

찾아오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기본 설정은 동일하다.

 

 

 

 

 

 

 

 

 

 

 

 

 

 

 

 

하지만 산타 클로스와 몇 가지 재미있는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의상. 얼핏 보면 닌자같기

 

도 하고 가죽 도착증 환자 같기도 한 산타 클로스에 비해, 신터 클라스는 주교라는 본래의 설정에 보다 충실하

 

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찾아 보았는데 위 사진에서 보이는 의상 디자인은 시대나 장소에 관계없

 

이 대체로 비슷하였다.

 

 

 

 

 

 

 

 

 

 

 

 

 

 

 

 

 

 

두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탈것이다. 주교라는 오래된 설정에 충실한 것을 보자면 탈것도 산타 클로스의 공중썰

 

라는 반중력적 비히클에 대비되는 전통적 교통수단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분이 타고 다니는 것은 무려

 

기선. 인터넷을 뒤져보니 성 니콜라스가 터키 지역에 있다가 스페인으로 가 아동 구호 활동을 하였고, 당시 스페

 

인에서 네덜란드로 갈 수 있는 교통 수단이 증기선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정이 생겼다는 주장이 꽤나

 

많았는데, 성 니콜라스가 4세기 경의 인물인 것을 생각해 보면 반성 없이 전해지는 지식인 것만 같다. 증기선이

 

라는 설정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신터 클라스가 민간의 전승 수준을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 구체화된

 

것은 19세기에 쓰여진 한 동화책이었는데, 당시의 문명을 상징하는 총아가 증기선이었기 때문에 동화책의 저자

 

가 신터 클라스는 증기선을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번째 차이는, 산타 클로스가 뜬금없이 북극에 기지를 두고 출동하는 것에 비해 신터 클라스는 스페인이라는

 

구체적 지역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건 위에서 설명했듯이 성 니콜라스에게 스페인 지역에서의 아동 구호 활동이

 

라는 이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신터 클라스는 11월 중반쯤 증기선을 타고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네덜

 

란드에 도착하는데, 도착하는 도시는 매년 돌아가면서 바뀐다고 한다.

 

 

 

 

 

 

 

 

 

 

 

 

 

 

 

 

 

 

네번째 차이는, 산타 클로스가 찾아오는 밤이 12월 24일 반면 신터 클라스는 성 니콜라스의 축일인 12월 6일의

 

하루 전날 밤, 그러니까 12월 5일 밤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의미야 더 좋지만, 전세계적으로 12월 24일엔 영

 

고 상업 제품이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때려 대는데 네덜란드 사람들도 놀기는 24일날에 맞춰 놀겠지, 하고 생각

 

했는데. 찾아보니 네덜란드에서는 실제로 12월 6일이 공휴일일 뿐만 아니라 12월 25일보다 훨씬 큰 축제들이

 

열리는 날이라고 한다. 그럼 25일은 어떻게 되나, 하고 더 찾아보니 25일은 25일대로 또 논다고. 역시 OECD 국

 

가 중 1인당 노동 시간 최단 국가. (2010년 자료에 의하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1년 노동 시간은 OECD 평균인

 

1749시간보다 약 400간이나 적은 1377시간. 1377시간인 나라도 있는데 평균을 1749시간까지 올린 주범들

 

중 1위가 바로 한국. 같은 조사에서 한국의 노동 시간은 2193시간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극적인 차이는 수행 비서인 '검은 피트(Zwart Piet)'의 존재이다. 위 그림에서 왼쪽에

 

 있는 마조에게 입힌 것이 검은 피트의 의상이다.

 

 

 

 

 

 

 

 

 

 

 

 

 

 

 

 

검은 피트는 신터 클라스를 수행하며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행동으로 흥을 돋는 역할을 한다. 피트의 등장

 

도 19세기부터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설명이 있다. 그 하나는 중세 때부터 있어왔던 악마 캐릭터의 변형이라

 

는 주장이다. 중세의 겨울에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여 신터 클라스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역할극이 공연되었는

 

데, 여기에서 갈등을 만들고 장난을 치는 악마가 있었고 그 악마의 색이 검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유럽의 신화나 전설에 있어 악마 캐릭터는 해피 엔딩을 만들기 위해 결정적 순간에 단 한 번의 실수로 패

 

배하고 마는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주인공에 비해 뛰어난 기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검

 

은 피트는 순발력이 떨어지고 하급 노동을 맡으며 본인의 의도로 웃음을 만들기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됨으로써

 

웃음을 만드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캐릭터는 흑인 노예 제도가 일상화되어 있던 19세기 제국

 

의 유럽유색인에 대한 악의적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20세기

 

까지도 네덜란드로 이민 온 유색인종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피트라고 놀림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75

 

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남미의 수리남에서는 주인인 백인 신터와 몸종인 흑인 피트의 관계가 인종주의적인

 

시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신터클라스 행사를 금지하는 법안이 입법되기도 했다. 인형이나

 

전등으로 만들어지고 땡인 루돌프에 비해 참으로 사연 많은 캐릭터라 하겠다.

 

 

 

 

 

 

 

 

 

 

 

 

 

 

 

아무튼, 그림 한 편 그리려다 공부 잘 했다. 검색 도중 이와 같이 눈이 번쩍 띄이는 상품도 발견했지만, 애석하게

 

도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만 한정 판매.

 

 

 

 

 

 

 

'일기장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대 대선 하루 전날 저녁 일곱시 반  (1) 2012.12.18
도서관에서  (1) 2012.12.11
신터 클라스와 피트  (0) 2012.12.03
초겨울 광장시장  (1) 2012.11.27
깨달음  (1) 2012.11.13
<붉은 돼지>, Savoia S.21  (1) 2012.11.08
Posted by 최대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독서일지2012.10.18 03:19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집필한 나카노 교코의 최신작. 저자와 책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더라도, 온라인이나 오

 

프라인의 서점을 기웃거린 분이라면 다음의 그림이 들어간 표지를 기억하실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인데, 작가의 위상이나 그림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보다는 왼쪽 남성이 우리나라의 한 고위 공직자와 무척 닮아서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아무튼, 이 책은 전작들인 <무서운 그림> 시리즈의 연장선 상에 있다. 계속해서 작가의 작품들을 접해 온 사람들

 

은 소재가 되는 그림과 해설이 겹치는 것을 몇 차례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바뀐 새 편

 

집 방식에 맞춰 읽어나가는 재미도 색다르고,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림 읽는 공부라는 것이 반복하면

 

반복할 수록 조금씩 더 보이는 것이 있기도 하고 하니 다시 읽어도 딱히 후회될 것은 없겠다.

 

 

 

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은, 사실 '(알고 보면) 무서운 그림'들이다. 물론 보자마자 다소간의 이질감이나 선

 

득함을 느끼게 되는 그림들도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외양이나 정돈된 구도 등에

 

가려져 있는 섬뜩한, 혹은 비극적인 뒷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것은 단지 귀여운 아이의 초상화일 뿐이다. 머리 길이 탓에 사내아이인

 

지 여자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게는 상관 없는 일이고, 피부가 다소 창백해 보이지만 백인이니까 그렇

 

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굳이 눈여겨 볼 일이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것

 

은 아마 크리넥스 티슈곽에서나 새로 산 액자에 끼워져 있을 때 정도일 것이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면,

 

아이의 핏기가 적은 얼굴 한 편에 우울한 빛이 숨어 있고, 또 키나 머리 크기로 짐작되는 나이에 비해 묘하게 늙

 

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나카네 교코는 바로 이런 지점을 파고 든다. 미술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저 '옛날 그림' 정도로 여겨지

 

는 작품을, 독자에게 '읽어' 주는 것이다.

 

 

 

위 그림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이다. 당연히 주인공인 저 아이가 스페인의 펠리페 왕

 

자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아이는 4살 때 죽었다. 죽을 아이여서 그랬나보다, 하고 생각하면 어쩐지 쓸쓸

 

하고 감상적으로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초상화가 생전에 그려진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림 읽기 연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아이의 요절에 대해 나카네 교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로스페로 왕자가 속해 있던 스페인 왕

 

가는 고귀한 혈통끼리의 혼인을 중요시했다. 다른 왕국에 적합한 배우자가 있다 하더라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트 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선택지는 더욱 줄어들어, 현실적으로 스페인 왕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오스

 

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의 제후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도 한정된 국가 간에 수 세기에 걸쳐 혼사가 이루

 

어지다보니, 다른 국가에서 배우자를 맞아온다 하더라도 실제로 따져보면 근친인 경우가 많았다. 프로스페로 왕

 

자의 탄생은 5대 간에 걸친 근친혼의 결과물이었다.

 

 

 

나카네 교코의 자세한 설명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왕자의 고조 할아버지는 사촌누나와 결혼했다. 그 아

 

들인 증조 할아버지는 조카딸과 결혼을 했다. 아이의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 쪽이 나와 형제나 사촌 관계일 경우

 

조카라고 하지만, 이 조카딸의 아버지는 사촌형, 어머니는 친여동생이었다. 이중의 근친이었던 셈이다. 그 사이

 

에서 나온 왕자의 할아버지는 사촌형의 딸, 즉 조카딸과 결혼했고 왕자의 아버지 또한 조카딸과 결혼하여 프로

 

스페로 왕자를 낳았다. 선조가 어느 정도 근친교배를 하였는지 측정한 수치를 근친계수라고 하는데, 부모가 완

 

전한 타인일 경우 0, 부모가 자웅동체여서 혼자 한몸 교배를 하였을 경우 1이다. 우리 대부분은 0이거나 0에 가

 

까운 근친 계수를 갖고 있다. 현대 스페인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스페로 왕자의 근친계수는 무려 0.254였다고

 

한다. 근친간의 결혼이 자식 세대에 희귀한 질병을 유발하거나 면역력을 낮추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카네 교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프로스페로 왕자가 죽은 뒤 태어난 남동생, 즉 카를로스 2세는 어떠했는지

 

그 초상화를 소개한다.

 

 

 

 

 

 

 

 

악의적으로 과장된 것이 아닐까 싶게 병약한 인상이지만, 이 그림을 그린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는 궁정화가로

 

그러한 객기를 부릴 수 없는 처지였다. 직접 다른 초상화들을 검색해 보니, 그나마 이 그림은 와중 가장 정상적

 

인 인상에 가까워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카를로스 2세는 정신 쇠약의 증세를 보였으며 생식 능력이 없었고

 

29세에 요절한다.

 

 

 

 

 

다시 프로스페로 왕자의 초상화로 돌아가 보면, 근친혼과 같은 역사를 잘 알아두지 않아도 그림에는 불길한 징

 

조들이 몇 가지 드러나 있다.

 

 

 

 

 

 

 

 

왕자가 입고 있는 것은 여자아이의 옷이다.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신분이 높은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의 옷을

 

입어 사신이나 마귀의 눈을 피하는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까운 일본에도 그러한 풍습이 있다. 그런

 

데 왕자의 이 아동복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당시 스페인에는 따로이 아동복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때그때 몸 크

 

기에 맞추어 어른들의 옷을 줄여입힐 뿐이었는데, 그 모양새를 맞추기 위해 아이에게도 코르셋을 입혔다고 한

 

다. 왕자는 저 옷 아래 꽉 끼는 코르셋을 입고 있는 셈이다. 코르셋은 성인 여성에게조차 심폐 기능이나 소화 기

 

능에 지장을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약한 출신이었던 왕자가 그러한 코르셋을 입는 것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리 없다. 왕자는 몇 차례나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작가는 이 코르셋에도 다소간의 혐의가 있

 

는 것은 아닌지 타진해 본다.

 

아울러 옷에는 방울과 약초를 넣은 꾸러미 등이 달려 있는데, 악마나 천사의 존재를 사실로 믿고 있던 시대에 이

 

러한 장치들을 달아놓았다는 것은 단지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원이나 예방 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 아이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던 조치였을 것이다.

 

 

 

 

 

책에는 이와 같은 그림과 이야기들이 총 8개의 장으로 나뉘어 소개되고 있다. 한 장은 다음과 같이 기획된다. 일

 

단 제목이나 화가도 적혀 있지 않은 그림을 첫 페이지에 소개한다. 그 뒤로는 그림에 대한 정보, 얽힌 이야기들

 

이 제시된다. 필요하다면 정보나 이야기와 관련된 다른 그림들도 소개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설명이 되고 나면,

 

본래의 그림을 다시 보여준다. 이번에는 그림 바깥의 여백에 그동안 설명했던 주요한 포인트들을 다시 적어주어

 

그림을 한층 자세히 읽게 한다. 그리고는 해당 그림, 혹은 그림의 주제, 피사체, 화가로 범위를 넓혀 한 차례 새

 

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뒤 한 장이 끝난다. 그야말로, 그림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배치해 놓은 구성이다.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하고는 몇 장이고 설명을 늘어놓아, 계속해서 그림이 나왔던 앞 장으로 돌아가 보며 읽어야 하는 평

 

이한 구성의 여타 그림책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큼직큼직한 도판과 명확하게 기획된 효율적 구성, 그리고 같은 주제에 오랜 기간 천착해 온 작가의 해박하면서

 

도 쉬운 설명. 그림에 관심이 있거나 관심을 가지려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최대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